Experiencing Christ
as Our Constant Salvation
우리의 계속되는
(끊임없는, 변함없는, 충실한)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함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유죄 판결이나
불 못에서 벗어난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매일의 계속적인 구원인데,
이 구원은 바로
살아 있는 인격이신
그리스도이다.
이 실지적인 구원,
매일의 구원,
순간순간의 구원은
우리가
살고 체험하고 누린,
바로 그 그리스도를
우리의 외적인 본만이 아니라
내적인 본으로
취한 결과이다.
이 구원의 주된 요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신 그리스도(빌 2:5-8)와
높아지신 그리스도(9-11절)이다.
이 본이
우리의 내적인 생명이 될 때,
이 본은
우리의 구원이 된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은
이 본을 이루어 내고
체험적으로
이 본의 복사판이 되는 것이다
― 벧전 2:21.
빌립보서 1장 19절에 있는
계속적인 구원은
어떤 믿는 이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특별한 일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하지만 2장 12절에 있는
계속적인 구원은
믿는 이들이
일상생활 가운데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직면하는
평범한 일들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은
이 구원을 완성하는 것,
곧 궁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 빌 2:12.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며,
이 구원의 절정은
주 예수님께서
높아지신 것과 같이
우리 존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 가운데서 높아지는 것이다
― 빌 2:9.
이제 우리는
내적 동기에 있어서의
두려움과
외적 태도에 있어서의
떨림으로
항상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이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
즉 이 구원을
궁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해야 한다
― 빌 2:12, 8, 삼상 15:22.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 빌 2:12-13.
우리가 항상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기 때문이다
― 빌 2:13.
우리 스스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며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뿐이다
― 골 1:29.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주관적인 구원으로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시고,
이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며
(고후 13:3상, 5),
우리 안에 계시는
그 영이시다
(롬 8:11).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어,
우리가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신다
― 빌 2:13.
뜻을 세우는 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뜻을 세우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것이
우리의 영에서 시작되어,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까지
확장되고,
결국에는
우리 물질적인 몸 안으로까지
확장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 롬 8:4, 6, 11.
하나님의 뜻의
기쁨은
(엡 1:5)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심으로
우리를
그분의 가장 높은 구원의
절정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 롬 5:10, 17.
불평하는 것과
따지는 것,
두 가지 모두는
우리의 구원을
최고도로 완성하는 것을
방해하고,
또 그리스도를
최대한으로
체험하거나 누리지 못하게 한다
― 빌 2:14.
불평하는 것은
감정에 속한 것으로서
주로 자매들에게서 나오고,
따지는 것은
생각에 속한 것으로서
주로 형제들에게서 나온다.
불평하고
따지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때문에
생긴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불평하고 따지는 것이
모두 끝난다.
우리가
나무랄 것이 없고
순결하여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이
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하거나
따지지 말아야 한다
― 빌 2:15.
나무랄 것이 없는 것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를 묘사하며,
순결한 것은
우리의 내적인 성품을 묘사한다.
순결한 것은
단순한 것,
(정치적이지 않고) 꾸밈없는 것,
흠 없는 것이다
― 마 10:16.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이 있다
― 요 3:16, 벧후 1:4.
사탄에게 강탈당한
어둡고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요일 5:19, 2:15-17),
우리의 기능은
발광체들로 빛나서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이다
― 빌 2:15-16.
그리스도는
해이시며,
달인 교회와
행성들인 믿는 이들은
생명의 말씀을 밝혀서
이분을 반사한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살아 냄으로써
이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고
제시하고
제공하는 것이다
― 행 5:20.
빌립보서 2장
12절부터 16절까지는
1장
19절부터 21절까지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사는 것에 대한
정의이다.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빌 2:13)
공급하시는 영이시다
(1:19).
발광체들로 빛나는 것은
(빌 2:15)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고
(1:20),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2:16)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1:21상).
그리스도를 사는
유일한 길은
생명의 말씀으로
적셔지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호흡이며
(딤후 3:16),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다
(요 6:63).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어야 하고,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 엡 6:17-18.
우리는
말씀을
노래하며 읽어야 하고,
노래함으로써
온갖 지혜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한다
― 골 3:16.
우리가 매일
살아 있는 말씀의
풍성으로 채워진다면,
자연스럽게
생명의 말씀을
밝힐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확대되시도록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6절까지는
우리의
계속적인 구원을 위한
신성하고 풍성한
공급을 계시해 준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본이신
주 예수님이 계신다
― 빌 2:6-11.
우리에게는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 빌 2:13.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 빌 2:15.
우리는
발광체들로서
그리스도의 신성한 빛을
반사할 자격이 있다
― 빌 2:15.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밝히고
제시할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 빌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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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그리스도를 우리의 계속적인 구원으로 체험함”
6일
골 3:16
온갖 지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되,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여러분의 마음에서
은혜로
하나님께 찬송함으로써
거하도록 하십시오.
엡 5:18-19
… 영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우리가
노래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여러 해 동안
성경을 읽어 왔다.
여러분은
단지 읽음으로써만이 아니라
또한 노래함으로써
성경 말씀을 취하는
실행을 해 왔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며 읽으라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것을 노래하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회복한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읽는 데까지
계속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노래함으로써
온갖 지혜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한 명령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적셔져서
그리스도를 살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바울이 제시한
실행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생각에서부터 오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래하고
시를 읊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의 영에서부터 오는
온갖 지혜에 의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노래하고
시를 읊어야 한다!
말씀을 노래하는 것은
말씀을 읽는 것보다 나으며,
말씀을 시로 읊는 것*은
말씀을 노래하는 것보다 더 낫다.
말씀을 시로 읊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누리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말씀을 시로 읊을 때,
우리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누림으로써
말씀이
우리를 적실
기회를 더 가지게 된다.
만약 우리가
말씀을 읽기만 한다면,
우리가 읽는 부분이
우리 안에 스며들고
우리의 존재를 적실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말씀을
노래하고
특히 그것을
시로 읊는다면,
우리는
말씀을 향해
우리의 존재를
더 완전히 열어서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스며들고
우리를 적실
기회를 가지게 할 것이다.
… 단지 집회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시로 읊지 말라.
우리의 온 존재로
말씀을 노래하고
시로 읊기 위해
매일
말씀 앞에 나아오라.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시로 읊기 위해
우리의
목소리와 생각과
마음과 영을
훈련하자.
더욱이 나는
이제부터
교회 집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데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되기를
바란다.
아마 어떤 집회에서
우리는
에베소서 전체를
노래하거나
시로 읊게 될 수도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온 집회를
이것을 위해 드린다면
이 서신서 안에 있는
풍성을 만지게 될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8절과 19절은
골로새서 3장 16절과
비슷하다.
… 우리가
이 두 부분의 말씀을
합쳐 볼 때,
우리는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함을
본다.
이 두 부분의 말씀은
동일한 목표,
즉 우리가
말씀으로 충만한
우리의 영을
가져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말씀을
노래하고
시로 읊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요소가
우리 안으로 주입될 때,
우리는
자연히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산다.
종종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떤 요소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주입됨이 없이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노래하고
시로 읊을 때,
우리는
말씀 안에 포함된
신성한 요소로 적셔지며,
말씀을 통하여
신성한 요소가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가
말씀을
노래하고
시로 읊을수록
더욱더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 안에 스며들며,
말씀을 통해
신성한 요소로 적셔질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요소로
조성될 것이다.
자동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먹은 것이
될 것이며,
우리가 흡수한 것을
살아 낼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는 길이다.
빌립보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생명의 말씀을
밝히십시오.”
라고 말한다.
생명의 말씀은
죽은 문자들로 된
교리와는
매우 다르다.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호흡이며
(딤후 3:16),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다
(요 6:63).
우리는
우리의 본이신
주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으며
(빌 2:6-11),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
(13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15절).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한 빛을
반사할 자격이 있는
발광체들로서
(15절),
다른 이들에게
밝히고
제시할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신성하고 풍성한
공급인가!
이러한 공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최고도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시로 읊는 것은
묵상을 포함하는
일종의 노래이다.
노래하는 것 자체는
많은 묵상을
포함하지 않지만,
시로 읊을 때에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포함한다.
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57장, 707-708쪽, 58장, 720쪽 참조.
‘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에서는
개역 개정판에 따라
‘시로 읊조리다’가 아닌
‘찬송하다’로 번역됨
—역자 주.
5일
빌 1:19-21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
19절부터 21절 상반절까지에서
우리는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과
그리스도를 확대함과
그리스도를 사는 것을
본다.
2장 12절과
13절 상반절,
그리고 16절 상반절에서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것과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을
본다.
빌립보서의 이 두 부분에서
우리는
두 노선을 가진다.
첫 번째 노선은
구원과 그 영과 그리스도이고,
두 번째 노선은
구원과 하나님과 말씀이다.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공급하시는 영이시다.
…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바울은
그의 환경이
그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결국에는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영으로부터 오는
공급을 체험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신다.
이것은 단지
교리가 아니라
영적인 체험의 사실이다.
발광체들로 빛나는 것은
(빌 2:15)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 2장에 있는
구원이
1장에 있는
구원과 동일함을
가리킨다.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넘치는 공급을 가지신
그 영과
동일하며,
발광체들로 빛나는 것은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과
동일하다.
빌립보서 2장 16절에 따르면,
우리가
발광체들로 빛나는 길은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이다.
…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그러한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며,
심지어 그들에게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제공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가족과 친척과
이웃과 동료들과
친구들과 또는 급우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 여러분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들의 상황 안에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적용한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표현이다.
발광체들로서 빛나는 것은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고,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서는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
필요하다.
… 이 넘치는 공급은
말씀 안에
저장되어 있다.
성경에 따르면,
그 영과 말씀은
하나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주 예수님은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말씀이 그 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6장
17절과 18절은
그 영께서 말씀이심을
지적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이다.
우리는
이 호흡이
‘프뉴마(pneuma)’, 즉 그 영임을
지적했다.
… 그 영은
하나님의 호흡이시며,
말씀 또한
하나님의 호흡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호흡은
그분의 ‘프뉴마’, 즉 그 영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영이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영은
말씀이다.
에베소서 6장
17절과 18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온갖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그 영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말씀과 그 영의 방면을
모두 다룬다.
더욱이 그는
우리에게
온갖 기도로,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기도,
즉 들을 수 있는 기도와
소리를 내지 않는 기도,
긴 기도와 짧은 기도,
빠른 기도와 느린 기도,
개인적인 기도와
함께하는 기도 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다.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것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는 단지
읽기 위해
우리의 눈을
사용하거나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 우리의 성경 읽기는
기도와 섞여야 한다.
이것이
기도로 읽는 것이다.
…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호흡,
즉 그 영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적셔지고,
공급을 받으며,
신선해지고,
빛 비춤을 받는다.
성경은
우리의 체험에서
공급하시는 그 영이 된다.
4일
빌 2:15-16
그러면 여러분은
나무랄 것이 없고
순결하여,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세대 가운데서
세상의 발광체들로 빛나서
생명의 말씀을 밝히십시오.
그래서 내가
헛되이 달리지 않았고
헛되이 수고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하도록 해 주십시오.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그러면 여러분은
나무랄 것이 없고
순결하여,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세대 가운데서
세상의 발광체들로 빛나서
”라고 말한다.
‘그러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되기 위해서’를
뜻한다.
우리가
나무랄 것이 없고
순결하여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이
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하거나
따지지 말아야 한다.
‘순결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또한
‘단순한,
꾸밈없는,
흠 없는,
그러므로 해가 없는’
(마 10:16)
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혼합되지 않은’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왔다.
‘나무랄 것이 없고’는
우리의 외적인 행위를 묘사하고,
‘순결하여’는
우리의 내적인 성품을 묘사한다.
꾸밈이 없다는 말은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사람은 분명
나무랄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꾸밈이 없다면,
우리는
순결하고
해가 없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
바울은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이 있다
(벧후 1:4).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태양(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발광체들이다.
발광체들인 우리는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
흠이 없다.
‘흠 없는’ 것은
순결하고
나무랄 것이 없는
완전한 특성이다.
‘비뚤어진’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휘어지거나
왜곡된 것을
뜻한다.
오늘날의 세대가
휘어지고 왜곡된
세대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세대 가운데서
우리는
세상의 빛들로
빛나야 한다.
빌립보서 2장 15절에 언급된
발광체는
햇빛을 반사한다.
믿는 이들은
이러한 발광체들로서
세상에서 빛을 발한다.
그들은
자신 속에
어떤 빛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할 수 있는
하늘에 속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해이시며,
달인 교회와
행성들인 믿는 이들은
생명의 말씀을 밝혀서
(16절)
이분을 반사한다
(빌 2:15).
빌립보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생명의 말씀을
밝히십시오.
그래서 내가
헛되이 달리지 않았고
헛되이 수고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하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다.
‘밝히십시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또한
‘적용하십시오,
제시하십시오,
제공하십시오’
라는 의미도 지닌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살아 내고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은
그분의 기쁨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어,
뜻을 세우도록 하시고
행하도록 하시는
삼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에
서로 관련 있는
다섯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리스도를 사는 것,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
그리스도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운행하신 결과로
우리는 자연히
생명을 가지게 되고,
그 생명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밝힌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제시하고,
제공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고
우리가
말씀으로 충만하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든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표현이 될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빌립보서 2장 16절에서
… ‘밝히십시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적용하고
제시하고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제시하고,
제공하며,
그들의 상황 안에서
그것을
그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하며,
다른 이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평하거나 따지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구부러지거나
비뚤어진 것과
관련된 것은
어떤 것도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만을
제공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 때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
3일
빌 2:13-14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시어,
여러분이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하거나
따지지 마십시오.
엡 1:5
우리를
그분 자신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들임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그분의 뜻의
충분한 기쁨에 따라서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뜻의
기쁨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어
하나님 자신께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뜻을 세우는 것은
우리 안의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의지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것이
우리의 영에서 시작되어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까지
확장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영과 함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뜻을 세우도록 운행하시는 것은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지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운행은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의지 안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뜻을 세우도록’ 운행하시면서,
그분의 ‘행함’을 수행하신다.
이것은
로마서 8장과 일치하는데,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영 안에서
일하실 뿐만 아니라
(4절),
또한 우리의 생각 안에서
(6절),
결국은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에서도
일하시는 것을
본다
(11절).
우리는
의지로 뜻을 세우고
몸으로 행한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에서부터
운행하기 시작하시어,
우리의 의지를 통과하시고,
그러고 나서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으로까지
운행하신다.
하나님의 운행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것이다.
그분의 기쁨은
그분의 뜻에서 비롯된
마음의 갈망이며
(엡 1:5),
우리가
그분의 가장 높은 구원의
절정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방식에서
어머니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예는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설명해 준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그분 자신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운행은
우리를
그분의 가장 높은 구원의
절정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기쁨 안에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실 때,
우리는
그분께 순종함으로써
그분과 동역한다.
빌립보서 2장
14절부터 16절까지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에 관한
바울의 말의 계속이다.
12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라고
명하며,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이제 14절에서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하거나
따지지 마십시오.”
라고 경고한다.
불평하는 것은
감정에 속한 것으로서
주로 자매들에게서 나오고,
따지는 것은
생각에 속한 것으로서
주로 형제들에게서 나온다.
두 가지 모두는
우리의 구원을
최고도로 완성하는 것을
방해하고,
또 그리스도를
최대한으로
체험하거나 누리지
못하게 한다.
문맥을 볼 때,
우리는
우리가 불평하거나 따질 때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불평하고 따지는 것이
모두 끝난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기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자매들은
자신이 불평할 때
자신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형제들은
자신이 따질 때마다
자신 안에서 운행하시는 분께
반역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만
불평하고
따지는 것이
죽음에 넘겨질 수 있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 14절에서
불평하고
따지는 것에 관해
말한 것은,
그가
빌립보서를 쓴 목적이
교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체험과 매우 많이 관련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 준다.
불평하는 것과
따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좌절시키는
주요 요인들이다.
체험을 통해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내려면
모든 일에서
불평하거나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 우리는
중요한 일에서
불평하거나
따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서는
불평하거나
따지기가 쉽다.
어떤 종류의 말이든
불평하는 말이나
따지는 말은
삼일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일하시는 것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평하고
따지는 것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는
불평하는 것이
감정에서 나오고
따지는 것이
생각에서 나온다는 것을
지적했다.
… 우리는
빌립보서 2장 14절에서
바울이 한 말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자매들은
자매의 집에서
접시를 닦을 때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형제들은
봉사 집회나
교회생활에서
문제들을 다룰 때
모든 일에서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따지지 않고
단순히 주님을 섬겨야 한다.
2일
빌 2:12-13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항상 순종한 것처럼,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시어,
여러분이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은
이 구원을 완성하는 것,
곧 궁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며,
이 구원의 절정은
주 예수님께서
높아지신 것과 같이
우리 존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 가운데서
높아지는 것이다
(빌 2:9).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항상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이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
즉 이 구원을
궁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았고,
이제 순종하여
이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
이렇게 순종하는 것에는
우리가
혼 안에서
참되게 하나 되는 것도
포함된다
(2절).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한 번 만에 영원히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구원을 완성하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지는 일이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라고
명한다.
두려움은
내적인 동기이며,
떨림은
외적인 태도이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시어,
여러분이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절 처음 부분에 있는
‘왜냐하면’은
우리가
항상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준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이시며
(빌 2:6-11),
우리의 구원의 표준이신
(12절)
주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도록,
곧 우리의 구원이
궁극적인 결말에 이르도록
뜻을 세우게 하실 뿐 아니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며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뿐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뜻을 세우는 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구원을 일해 내는 것은
(To work out salvation;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푸는 것은, 이끌어 내는 것은])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is not to accomplish;
완수하는 것이[이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는 순종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그 구원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은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계속적인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은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 있는
순종에 대한
바울의 말은
그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
말한 것의
(8절)
반응이다.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의
가장 두드러진 면은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먼저 자신을 비우시는,
곧 그분의 신격의
표현을 내려놓으시는
중요한 단계를 밟으셨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자신을 비우시고
사람의 모습을 가지시어
자신을 낮추셨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신 것은
특히 순종과 관련된다.
성경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사무엘기상 15장 22절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본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항상 두려움과 떨림으로
순종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두려움을
내적인 동기로 가져야 하고
떨림을
외적인 태도로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다.
우리의 구원은
단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한 인격,
곧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삼일 하나님 자신이다.
13절에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시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삼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빌립보서 전체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책의 마지막 절인
4장 2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영과 함께할 때,
분명히 이 주님은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과
분리된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영과 함께하시는
이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아가서 1장 19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을 말한다.
우리를 공급하시는
그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 영이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영은
우리 안에 운행하시는
하나님과 분리되실 수 없다.
이 모든 절들과 함께
이 서신서의 문맥을
전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삼일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시고,
이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며
(고후 13:3상, 5),
우리 안에 계시는
그 영이시다
(롬 8:11).
신언노트, 2019 07 21
우리의 계속되는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함
빌립보서 2장 12절 안에 있는
그 구원은
하나님의 유죄 판결로부터의
또 불의 그 못으로부터의
(from the lake of fire;
불인 그 호수로부터의)
영원한 구원이 아니고
오직 살아 계시는 한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이신
매일의 또 계속되는
그 구원입니다:
실용적인
(practical;
실제의, 유용한, 실지적인),
곧 매일의,
곧 순간순간의
(moment-by-moment)
이 구원은
우리가
살고,
체험하며,
또 누리는
바로 그 그리스도를
외적일 뿐 아니라
내적인
우리의 본으로
취함으로부터
생깁니다
(results from;
취함의 결과로 발생합니다):
이 구원의
그 주요한 요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또 그분의 높여지심 안에 계시는
(in His exaltation;
그분을 높임 안에서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본이
우리의 내적인 생명이 될 때,
그 본이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을
일해 내는 것은
(To work out;
푸는[이끌어 내는, 산출하는,
가져오는, 만들어내는, 해결하는,
성취하는, 이루어 내는] 것은)
이 본을
일해 내는 것이고
또 체험 안에서
이 본의 한 재판물이
(a reprint;
한 재인쇄본이[복사본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19절 안에 있는
그 계속되는 구원은
그 안에서
특정한 한 믿는 이가
(a particular believer;
한 개별적인[독특한, 특별한] 믿는 사람이)
특정한 한 상황 안에서의
(in a particular situation)
특별한 한 마주침으로부터
(from a specific encounter;
특정한[독특한, 구체적인, 분명한]
한 맞딱뜨림에서부터[만남에서, 접촉에서])
구원받는
하나이고
(one; 구원이고),
반면에
(, whereas;
… 하나이지만[하나임에 반하여,)
2장 12절 안에 있는
그 계속되는 구원은
그 안에서
어떤 믿는 이든지
(any beliver; 어느 믿는 사람도)
그의 매일의 생활함 안에서
일반적인 상황들 안에서의
(in common situations;
흔한[공동의, 공통의, 보통의] 상황들 안에서)
평범한 것들로부터
(from ordinary things;
보통의[일상적인] 일들에서부터)
구원받는
하나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일해 내는 것은
그것을 수행하는 것
(to carry it out;
구원을 완수하는 것),
곧 그것을
그 궁극적인 끝으로
(to the ultimate conclusion;
그 최종적인[최후의] 결말에)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였고,
이는
(which; 하나님의 구원은)
주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가
영광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높여짐을
그것의 절정으로서
가집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of fear;
두려움의, 두려움인)
그 내적인 동기와
또 떨림이라는
그 외적인 태도를 가지는
(with;
가지고, …와 함께하는)
우리의
계속되는 또 절대적인
순종에 의하여
이 구원을 수행할,
곧 그것을
그것의 궁극적인 끝으로 가져올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부의 움직이시는 하나님
그분 자신께서
우리의 구원이시고,
또 그분께의 순종이
우리의 구원을
일해 냄입니다.
우리가 항상
순종할 필요가 있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is that …; 움직이심입니다):
우리 스스로
(by ourselves;
우리끼리만, 도움을 받지 않고,
우리 자신들만의 힘으로)
우리의 구원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but)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셔서
그것을 하십니다;
우리가 할 필요가 있는
그 유일한 일은
(the only thing;
그 단 하나의 것은)
그 내부의
움직이시는,
곧 힘을 주시는
(energizing;
동력을 공급하시는, 활기를 북돋우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구원으로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 삼일 하나님
―그 아버지, 그 아들, 또 그 영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또 우리 안에 계시는 그 영이신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충분한 기쁨을 위하여
(for His good pleasure)
그 뜻함과
(the willing)
또 그 일함
(the working)
둘 다를
우리 안에서
움직이십니다
(operates;
운행하십니다[일하십니다,
처리하십니다, 다루십니다,
…에 효과적으로 작용하십니다]):
그 뜻함은
안에 있고,
그 일함은
밖에 있습니다.
그 뜻함은
우리의 의지 안에서
일어나는데
(takes place;
생기는데, 발생하는데),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우리의 영에서부터
시작하고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 안으로
또 결국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으로
퍼집니다
(spreads;
번집니다, 확산됩니다, 미칩니다).
하나님의 뜻의
그 충분한 기쁨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것이고
그래서(so that)
우리가
그분의 가장 높은 구원의
(of His supreme salvation;
그분의 가장 중요한
[최고의, 극도의, 궁극적인] 구원의)
그 절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중얼거림들과
(Murmurings;
투덜거림들과, 불평함들과, 소곤거림들과)
또 추론함들은
(reasonings;
논함들은, 설명하여 설득함들은,
이치를 설명함들은, 추측함들은, 따짐들은),
그 가장 충만한 정도까지
(to the fullest extent;
최대한으로, 완전하게)
우리의 구원을
수행함으로부터
(from carrying out; 완수함으로부터)
또 극도로
(to the uttermost; 그 가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그리스도를
체험함과 또 누림으로부터
우리를 좌절시킵니다
(frustrate; 방해합니다).
중얼거림들은
우리의 감정에 속하고
또 주로 그 자매들로부터 옵니다
(come … from;
나옵니다, 생겨납니다, 비롯됩니다);
추론함들은
우리의 생각에 속하고
또 주로 그 형제들로부터 옵니다.
중얼거림들과 또 추론함들은
하나님께의 불순종에 기인합니다;
하나님께의 순종은
모든 중얼거림들과 또 추론함들을
죽입니다
(slays; 파괴합니다).
우리가
나무랄 데 없고
(blameless;
비난할 여지가 없고, 결백하고,
아무 잘못도 없고, 떳떳하고)
또 교활하지 않은
(guileless;
간계가 없는, 속임수를 모르는,
정직한, 성실한, 순진한),
흠 없는 하나님의 아이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중얼거림들과
또 추론함들 없이
모든 것들을
해야 합니다:
‘나무랄 데 없는’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를
묘사하고,
또 ‘교활하지 않은’은
우리의 내적인 성품을
(묘사합니다);
교활하지 않음은
단순한,
꾸밈없는
[artless;
소박한, 자연스러운, 천진난만한]
(정치적이지 않은
[not political; 정략적이지 않은]),
또는 순진한 것입니다
(to be … innocent;
천진난만한[해롭지 않은,
악의 없는, 결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이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또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에 의하여
강탈되는
(is usurped;
빼앗기는, 불법 사용되는,
침해[침범, 횡령]되는),
어둡고 또 부패한
그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우리의 기능은
발광체들로서
(as luminaries;
천체들로서, 조명들로서)
빛나는 것이며,
생명의 그 말씀을
남 앞에서 길게 이야기합니다
(holding forth;
공개적으로[공식적으로] 충분히[상세히]
이야기합니다, 제안[제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해이시고,
그 달인
그 교회와
또 그 행성들인
그 믿는 이들로
생명의 그 말씀을
남 앞에서 길게 이야기함에 의하여
그분을 반사합니다
(공식적으로 충분히 이야기함에 의하여
그분을 반사하는
그 달인 그 교회와
또 그 행성들인 그 믿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 with; …을 가지십니다]).
생명의 그 말씀을
남 앞에서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살아 냄에 의하여
그 세상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
(to apply it;
그 말씀을 사용하는 것),
그것을 선물하는 것
(to present it;
그 말씀을 증정[제공]하는 것),
또 그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to offer it;
그 말씀을 제안하는[보여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부터 16절까지는
1장
19절부터 21절까지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삶의
한 정의입니다: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 공급하시는 영이십니다.
발광체들로서 빛나는 것은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고,
생명의 그 말씀을
남 앞에서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는
그 유일한 길은
생명의 그 말씀으로
흠뻑 적셔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그 말씀은
하나님의
그 살아 있는 호흡이고,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기도하며-읽을
필요가 있고,
모든
(all;
전체의, 전부의, 최대한의)
기도와 간구의
수단에 의하여
(by means of;
수단으로, …에 의하여,
…를 써서, …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노래하며-읽을
필요가 있고,
노래함에 의하여
모든 지혜 안에서
(in all wisdom; 모든 지혜로)
그리스도의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풍부하게 거하도록 합니다
(need to … , letting;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날마다
그 살아 있는 말씀의
그 풍부로
가득 채워진다면,
자발적으로
(spontaneously;
저절로, 자연스럽게)
생명의 그 말씀을
남 앞에서 길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고
그 결과(that)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확대되실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6절까지는
우리의
계속되는 구원을 위한
신성하고 또 풍부한
그 공급을
계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이신
주 예수님을
가집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가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이들이고,
하나님의 생명과
또 그 신성한 본성을
가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신성한 빛을 반사하는
자격이 주어진
(qualified; 자격이 있는)
발광체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길게 이야기하고,
선물하는
생명의 그 말씀을
가집니다.
1일
빌 2:5-7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할
보배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셔서,
노예의 모습을 가지시어, …
빌 2: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항상
순종한 것처럼,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십시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유죄 판결이나
불 못에서 벗어난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매일의 계속적인 구원인데,
이 구원은 바로
살아 있는 인격이다.
이 매일의 구원은
우리가
살고 체험하고 누린,
바로 그 그리스도를
우리의 외적인 본만이 아니라
내적인 본으로
취한 결과이다.
이 구원의
주된 요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신 그리스도(빌 2:5-8)와
높아지신 그리스도(9-11절)이다.
이 본이
믿는 이들의
내적인 생명이 될 때,
이 본은
그들의 구원이 된다.
오직 이렇게 될 때만이
사도의 기쁨이
넘칠 수 있다
(빌 2:12).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까지에 계시된
그 본은 이제
우리의 구원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12절의 시작에 있는
‘그러므로’라는 말에 의해
알 수 있다.
우리의 놀라운 본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한 후에,
바울은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십시오.”
라고 말한다.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는
포함하는 분이시자
배제하는 분이시다.
그 본이
배제한다고 하는 이유는
세상적이고,
육체에 속하며,
죄에 속한
모든 것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것들은
그분 안에서
어떤 입지도 가질 수 없고
그분께
접근할 수도 없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그분은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며,
하나님에 의해
높아지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하나님-사람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든지 적용할 수 있는
이러한 본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은
이 본을 이루어 내고
체험적으로
이 본의 복사판이 되는 것이다.
본이신 그리스도는
책을 인쇄하는 데 사용되는
원본에 비유할 수 있고,
본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은
책을 인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책을 만들 때,
원본은
많은 사본이 나올 때까지
거듭 복사된다.
우리의 체험에서
하나님-사람 구주는
복사되셔야 하고,
우리의 주관적인 구원이
되셔야 한다.
우리가 이루어 내야 하는
그 구원은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왜 바울이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그 영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나는
바울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본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했다는 것을
안다.
만약 우리가
이 절의 문맥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는
본이신 그리스도께서 또한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객관적으로
그분은 본이시며,
주관적으로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실 때
그분은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그분은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위한
본을 세우셨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이 본을 이루어 내기 위해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본은 구원이며,
구원은 운행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우리의 실지적인 구원으로서
매일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과 동역할 때마다
우리는
구원을 누린다.
하나님의 운행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
더욱이 이 구원은
그 본의
복사판이며 재생산이다.
그 본이
우리 안에서 복사될 때,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된다.
그 본의 복사는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수행된다.
빌립보서 1장에서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말미암지만,
2장 12절에서의 구원은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이 두 경우의 구원은
실지적인 구원이고,
매일의 구원이며,
순간순간의 구원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 있는
계속적인 구원은
어떤 믿는 이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특별한 일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하지만 2장 12절에 있는
계속적인 구원은
믿는 이들이
일상생활 가운데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직면하는
평범한 일들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빌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