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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교통 가운데서 공동의 누림을 갖도록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화평이 되심으로 활력 그룹과 같은 교회생활을 얻으시고 궁극적인 화목제물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심

Christ
as the Peace
between God and God’s People
for Their Co-enjoyment
in Fellowship
to Have the Vital-group Church Life
and to Consummate in
the New Jerusalem
as the Ultimate Peace Offering
교통 안에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 누림을 위한
그들 사이의 평안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활력그룹 교회생활을 가지시고
그 궁극적인 화목제물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심

우리의 번제물과 소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린 
결과는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 
평안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평안을 얻으려고 애쓸수록 
우리는 
더욱더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평안을 얻는 
유일한 길은 
매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평안을 가지는 정도가, 
우리가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를 누리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려야 하며, 
어제나 내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교통 가운데서 
공동의 누림을 갖도록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화평이 되신다.

화목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야 했다. 
이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물이 
연결되고 
동일시되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것은 
동일시되는 문제, 
곧 우리가 
그분이 되고 
그분께서 
우리가 되시는 
문제이다.

화목제물은 
누가복음 15장 23절과 24절에서 
영접하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돌아온 탕자인 
죄인 사이에 
화평의 누림을 가져다주는 
살진 송아지가 
예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평안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평안은 
모든 사람의 이해를 
초월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며, 
어떤 환경에서나 어떤 일에서도 
그리스도를 얻는지에 관한 
비결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상의해야 한다.

“이 비결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을 
어려운 일로 여긴다. 
사실상 여러분은 
다만 끊임없이 
주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살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유기적인 방면, 64쪽).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실행한 결과로
하나님의 평안, 
곧 평안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누림을 위해 
우리 안으로 주입되시어, 
고민에 대한 
안정제가 되시고 
(as the counterpoise to troubles;
걱정에 대한 평형추로서,
[고난에 대한 안정으로서]
… 주입되시고)
염려에 대한 
해독제가 되신다
(the antidote to anxiety
불안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 주입되신다). 
이럴 때 
우리의 관용이신
(our forbearance; 관대, 인내, 용서, 유예)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실 수 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평안의 강이시고 
위로하는 어머니이신 
주님을 누리게 된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광풍을 피하는 곳과 
폭우를 가리는 곳과 
마른땅의 냇물과 
황폐한 땅의 큰 바위 그늘이신 
주님을 누리게 된다.

빌립보서 4장 5절부터 9절까지에 나오는 
우리의 체험을 위한 
그리스도의 미덕들은 
평안이신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의 
표현이다.

바울은 
관용과 염려 없음을,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의
표현의 
첫째가는 두 가지 방면으로 
여긴다.

사탄에게서 오는 
염려는 
인간 생활의 총계이며, 
그리스도를 사는 
믿는 이들의 생활을 
어지럽힌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관용은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의 총계이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된다.

“여러분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빌 4:5.

관용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합리적이고, 
사려 깊고, 
배려하며, 
자기의 법적인 권리를 
엄격하게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관용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적게 받아도 
쉽게 만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따르면, 
관용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관용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미덕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관용은 
사랑과 인내와 
친절과 겸손과 
동정심과 사려 깊음과 
복종과 기꺼이 양보함을 
포함한다. 
모든 것을 포함한 
이러한 미덕을 가진다면, 
우리는 또한
의와 거룩함을 
갖게 될 것이다.

관용은 또한 
절제와 중용과 
온화함과 이해심과 
동정심과 지혜와 
긍휼과 평온함과 
주님을 앙망함과 
심지어 주님께서 
모든 일에서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미덕을 
포함한다.

관용을 베푸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상황에 적합하고
항상 알맞게 처신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관용을 베푼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지혜와 능력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고 
언제 말해야 할지를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관용을 베푸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나 말에 의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를 
고려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한 
미덕인 관용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께서 
관용이시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의 삶은 
관용이었다.

우리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확대한 
그리스도, 
우리가 
우리의 본으로 삼고 
우리의 목표로 추구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하는 것이다.

오직 주 예수님만이 
관용이 가득한 
삶을 사셨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오늘날 우리의 
완전한 관용이 
되실 수 있다.

우리의 관용이 
알려지게 하는 것은 
모든 인간 미덕들의 
총계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관용에 대해 말한 즉시, 
바울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고 
말한다.

공간적으로 
주님은 
우리와 가까우셔서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시간적으로도 
주님은
가까우셔서 
곧 오실 것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은 
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가리킨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빌 4:6-7.

‘모든 일에서’는 
매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많은 일들을 
가리킨다.

기도는 
경배와 교통을 
본질로 하는 
일반적인 것이다. 
간구는 
특정한 필요를 위한 
특별한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는 모두 
주님께 드리는 
감사가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는 
누군가를 향한 
동작을 나타내며, 
생생한 연결과 교제의 의미에서의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는 가운데’이다.

평안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순찰하시면서, 
우리가 
고요하고 안정되도록 
지키신다.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고요하고 안정되고 
평안하고 잠잠한 생활이다.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의 
첫 번째 방면은 
안정됨이다. 
여기에는 
경쟁이나 헛된 영광이나 
불평이나 따짐이 없고,
다른 이들과 논쟁하거나 
다투거나 싸우는 것이 없다.

“여러분의 관용이 
…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라는 말씀은
“여러분의 구할 것을 
… 말씀드리십시오.”
라는 말씀과 
비슷하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필요와 
구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가서 
그분과 대화한다면, 
우리의 염려는 
관용으로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만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즉 우리에게 
어떤 걱정이나 염려가 있다면,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 
그것을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알려 드리는 것은 
그분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이럴 때 하나님은 
이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심지어 우리가 구한 것에 
응답하시기도 전에,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분배하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와 연합시키신다. 
신성과 인성의 
실지적인 연합은
빌립보서 4장 6절에 묘사된 
왕래에 의해 
수행된다.

우리가 
염려 없는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환경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살며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우리의 운명을 이루도록
우리를 섬기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활력 그룹과 같은 교회생활을 
가지는지에 대한 
비결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교회생활은 
잔칫집, 
곧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잔치이며, 
여기에서 
그분과 그분의 연인들은 
안식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교회생활은 
부활 생명에 의해 
산출된다.

이러한 교회생활은 
깨끗하게 된 죄인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교회생활은 
외적으로 
가난하고 
고난을 받는다.

이러한 교회생활은 
주님의 임재 안에서, 
주님의 임재와 함께 
잔치를 누리는 
생활이다.

이러한 교회생활에는 
형제들보다 
자매들이 더 많다.

이러한 교회생활 안에는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는) 
마르다의 기능과 
(부활 생명을 증언하는) 
나사로의 기능과 
(주님께 절대적인 사랑을 쏟아붓는) 
마리아의 기능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궁극적인 화목제물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된다.

‘예루살렘’은
‘화평의 기초’ 
혹은 ‘평안의 기초’를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은 
우리의 화평(평안), 
곧 우리의 안전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새 예루살렘 전체가 
화평(평안)의 실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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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교통 가운데서 공동의 누림을 갖도록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화평이 되심으로 활력 그룹과 같은 교회생활을 얻으시고 궁극적인 화목제물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심”

6일

요 12:2-3 
사람들이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마르다는
시중을 들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그때에 마리아가 
… 향유 일 리트라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바르고 
… 그 집이 
향유의 향기로 
가득 찼다.

요 20:19 
그날, 
곧 그 주의 첫날 
저녁에 
…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에게 
평안이 있기를!”

요한복음의 어디에 
화목제물이 있는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도, 
화목제물과 같은 
그러한 것의 성취에는 
두 단계, 
즉 초기 단계와 완성 단계가 
필요하다. 
… 초기 단계의 성취는 
12장에 있다. 
거기에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의 집에 
잔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 예수님께서 
거기 계셨다. 
그 그림을 보라. 
그들이 
잔치를 누릴 때, 
그것은 
화목제물의 성취에 대한 
축소판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그분의 선민과 함께 
거기에 계셨으며,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평안이 있었고, 
누림이 있었으며, 
만족이 있었다. 
분명히 그것은 
화목제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화목제물의 성취의 
초기 단계일 뿐이었다.

화목제물의 
완전한 성취는 
주님의 부활 후에, 
곧 주님께서 
모든 종류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신 
이후에 있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돌아오셔서 
그들에게
“여러분에게 
평안이 있기를!”
(요 20:21)
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의 시작에는 
은혜가 있다.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은혜가 왔다. 
요한복음의 끝에는 
평안이 온다.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제물로 
드려지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먼저 그분은 
우리에게 은혜가 되셨고, 
그다음에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과 
만나셨을 때, 
그 집회는 
하나의 잔치였으며 
그 잔치는 
화목제물이었다. 
그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믿는 이들은 
우리의 평안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모일 때마다 
잔치, 
곧 화목제물이라는 잔치를 
가진다.

우리는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과 속건제물과 
번제물과 소제물로 
드린다. 
결국 모든 제물이 
함께 더해질 때, 
우리는 
우리의 만족을 위해, 
또한 그분의 만족을 위해 
화목제물을 누린다.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은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루’는 
‘기초’를 
뜻하며
‘살렘’은
‘화평’ 혹은‘ 평안’을 
뜻한다. 
…‘ 살렘’은 
평안이고
예루’는 
세워진 것, 
건축된 것, 
기초로서 놓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화평의 기초 
혹은 평안의 기초를 
뜻한다. 
예루살렘은 
평안 안에서 
터가 놓이고 
세워지며 
보호받는 것이다. 
… 신약에는 
두 가지 명칭이 있는데, 
곧 평안의 하나님(빌 4:9, 살전 5:23)과 
하나님의 평안(빌 4:7)이다. 
두 명칭 모두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평안이심을 가리킨다. 
…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화평, 
곧 평안이시라고 
말한다. 
이 평안은 
하나님인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터를 잡았다. 
이것은 
외적인 평안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는 
내적인 평안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여러분에게 
평안을 남겨 둡니다. 
곧 나의 평안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요14:27)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주님은 또한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들을 한 것은 
여러분이 
내 안에서 
평안을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여러분이 환난을 당하나,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그분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분의 평안을 
우리에게 남기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분의 평안 안에서 
살아야 한다. 
사실상 주님 자신께서 
우리의 평안으로서 
여전히 여기에 계신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평안, 
곧 우리의 안전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새 예루살렘 전체가 
평안의 실체일 것이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때 
평안 안에, 
즉 삼일 하나님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평안과 안전이신 
삼일 하나님 안에서 
견고하게 터를 잡고 
보호받을 것이고, 
우리는 
평안이신 삼일 하나님을 
영원토록 누릴 것이다.

 

5일

빌 4:5-7 
…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골 3:15 
그리스도의 화평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한 몸 안에 
부름을 받은 것도 
이 화평을 위한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빌립보서 4장 5절에서 
바울은 또한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라고 말한다. 
빌립보서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언급으로 여긴다.
… 그러나 이것은 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언급한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살고 
또한 그분을 얻기 위해 
그분을 
우리의 본으로 삼고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길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낀다. 
그분은 
공간적으로 
또한 시간적으로 
우리에게 가까우시다. 
공간적으로 
주님은 
우리와 가까우셔서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시간적으로도 
주님은 
가까우셔서 
곧 오실 것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우리가 
괴로워하고 격분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헛된 영광 때문에 
경쟁하거나 
불평하고 
따질 때에는 
이러한 관용을 
가지지 못한다. 
이러한 관용이 
부족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빌립보서 4장 5절부터 9절까지에는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을 보여 주는 
그림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있다면 
우리의 관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잔잔하고 
평온하며 
온유하다는 것과 
아무것도 
우리의 내적인 고요함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고 말한다.
가끔 우리는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 때 
근심하며 염려에 빠진다. 
염려는 
그리스도를 사는 것을 
손상시킨다. 
염려하는 대신 
우리는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평안이 
걱정과 염려로부터 
우리를 구해 준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라고 권한다.
‘모든 일에서’는 
매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많은 일들을 
가리킨다. 
주님의 축복 아래 
많은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좋은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부정적인 것들을 경험하고 
나쁜 소식들도 듣는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기도는 
경배와 교통을 
본질로 하는 
일반적인 것이다. 
간구는 
특정한 필요를 위한 
특별한 것이다. 
바울이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을 통하여’
라고 하지 않고,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라고 말한 것에 
주의하라. 
이것은 
우리의 기도와 간구 모두에 
주님께 드리는 
감사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빌립보서 4장 7절에서
‘지키실 것입니다’에 대한 
헬라어는
‘수비하실 것입니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평안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순찰하시거나 
보초를 서신다. 
마음은 근원이고 
생각은 결과이다.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지키신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평안이 
보초로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순찰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우리의 존재 안에서 
순찰하는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를 
고요하고 안정되도록 
지킨다.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과 염려가 있더라도 
아무것도 
우리를 
혼란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을 향해서는 
빌립보서 4장 5절에서 언급된 
관용이 필요하고, 
하나님께는 
바울이 6절과 7절에서 언급한 
교통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의 표현의 
두 가지 주된 방면인 
관용과 교통은 
우리를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에 있게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평온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인 것이 
우리에게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정적인 것들에 의해 
혼란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의 생활 환경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라. 
그리스도를 살라! 
그리스도를 사는 
여러분의 생활의 
첫 번째 표현은 
관용일 것이다.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고요한 생활이다. 
그러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4일

빌 4:5 
여러분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빌 4:8 
마지막으로 형제님들, 
무슨 일에든지 참되며
(what things are true;
[윤리적으로] 참된 것들이 무엇이든지), 
무슨 일에든지 장중하며
(what things are dignified;
품위 있는 것들이 무엇이든지), 
무슨 일에든지 의로우며, 
무슨 일에든지 순수하며, 
무슨 일에든지 사랑스러우며, 
무슨 일에든지 평판이 좋아야 하며
(what things are well spoken of;
좋은 말을 듣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고 어떤 미덕과 어떤 칭찬이 있거든
(if there is any virtue
and if any praise;
만약 어떤 미덕이 있고
또 어떤 칭찬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take account of these things;
이것들을 주의하십시오
[깊이 생각하십시오]).

웨스트(Wuest)는
그의 저서〈단어 연구〉에서
관용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적게 받아도
만족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달콤한 느낌을 주며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but also means
sweet reasonableness;
또한 상냥한 타당함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 단어는
자기 절제와
인내와
중용과
(moderation; 적당함, 온건, 절제)
친절과
온화함을
(gentleness; 예의 바름, 너그러움, 온순함, 유순함)
포함한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따르면
관용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미덕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관용하는 데
실패했다면
(if we fail
to exercise forbearance;
만약 우리가
관대함을 행하기 실패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어떤 미덕을
나타내는 데에서도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형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해도
만족하며
아내에게 관용을 베풀어
아내를 비난하거나
유죄 판결하지 않는다면,
그 형제는
관용을 통해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관용은
인내와 겸손과
자기 절제와 주님을 앙망함,
심지어 주님께서
모든 일에서
주권자이심을
시인하는 미덕을
포함할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부적절하게
(in an unseemly manner;
꼴사나운 방식으로)
처신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관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태도나 
불친절한 말 또한 
관용의 부족에서부터 
온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때
(fail to love;
사랑하기 실패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관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관용이 부족하므로 
편협하다
(may be intolerant;
못견딜[옹졸할] 수 있다). 
… 만일 우리에게 
관용이 없다면, 
우리는 
평안을 갖지 못할 것이다. 
… 평안은 
관용에서부터 온다.

관용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여러 번역본들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어떤 번역본들은 
이 헬라어 단어를
‘유연함’으로
(as “yieldingness”;
‘순종적임’으로)
번역한다. 
… 또 어떤 번역자들은 
이 헬라어 단어가
‘합리적이고, 사려 깊고, 
알맞고, 적합한 것’을 
(“reasonable, considerate,
suitable, and fitting”;
‘사리에 맞고, 배려하며,
적합하고, 또 어울리는’을)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해 준다. 
관용을 베푸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상황에 적합하고 
항상 알맞게 처신하는
사람이다
(is one
who always fits in,
one
whose behavior
is always suitable;
항상 어울리는[조화로운] 사람이고,
그의 행동이
항상 적합한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관용을 베푼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지혜와 능력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고 
언제 말해야 할지를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shall also have
the full knowledge of;
… 완전한[충분한] 지식을 가질 것이다). 
예를 들면, 
관용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 말하고 
언제 말해야 할지를 
알 것이다. 
…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알려지게 하는 
관용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빌립보서 4장 5절은
“여러분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관용 안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발견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 관용하려면 
먼저 우리는 
합리적이고 공정해야 한다
(must be reasonable and fair;
사리에 맞고 타당해야 한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 
관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일이나 말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고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들을 
손상하지 않는지를
(whether or not
our words
would damage people;
우리의 말들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아닌지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엄격하기를 피하고 
매우 사려 깊어야 한다.
…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하는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다른 사람과 
의견 충돌이 없고
(will not dissent with others;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항상 기뻐하며, 
항상 관용하고, 
염려가 조금도 없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생활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린다
(enjoys the peace of God;
평안이신 하나님을 누린다).

만일 빌립보서 4장 5절에 있는 
관용이라는 단어가 
어떤 다른 단어로 
대치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단어일 것이다.
“여러분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하는 대신에, 
우리는
“여러분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확대한 
그리스도,
우리가 
우리의 본으로 삼고 
우리의 목표로 추구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관용의 미덕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사랑과 친절과 
긍휼과 합리적임과 
적응하는 능력 등
(the ability to fit in,;
어울리는[조화되는] 능력,)
많은 다른 미덕들을 
포함한다. 
… 오직 주 예수님만이 
관용이 가득한
생활을 사셨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오늘날 우리의 
완전한 관용이
(perfect forbearance;
완벽한 관대함이)
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미덕의 
총계를 요약해서 
표현할 수 있는
(to sum up
the totality of
Christ’s human virtues;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들의
총계를
요약하는[합계하는])
가장 좋은 단어는 
관용이다.
우리의 관용을 
알려지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의지해 사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is to express
the Christ
by whom we live;
그분에 의해서 우리가 사는
그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활은 
모든 인간 미덕들의 
총계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것이 
우리의 관용이신 
그리스도이다.

 

3일

사 66:12-13 
… 내가 그에게 
평안을 
강같이 … 주리니 
너희가 
…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
(I now am extending 
to her 
peace
like a river,
… and you will nurse,
you will be carried 
on the hip,
and you will be bounced 
on the knees.
As one
whom his mother comforts,
so will I comfort you …
내가 이제 그녀에게 
평안을 
강과 같이 펼칠 것이라,
… 또 너희가 
젖을 먹을 것이라,
너희가 
그 허리께 위에 안길 것이며,
또 너희가 
그 무릎들 위에 까불 것이라.
그의 어머니가 
편안하게 하는 
한 사람과 같이
내가 
너희를 편안하게 할 것이라 …)

사 32:2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And a man
will be like a refuge
from the wind
and a covering
from the tempest,
like streams of water
in a dry place,
like the shadow of a massive rock
in a wasted land.
또 한 사람이
그 바람으로부터의 한 피난처와 
그 폭풍으로부터의 한 덮개와[지붕과] 같을 것이라,
한 마른 장소 안에 있는 
시냇물과 같을 것이며,
한 황무지 안에 있는 
한 큰 바위의 그늘과 같을 것이라.)

한 면에서 
그리스도는 
다스리는 
왕이실 것이며, 
또 다른 면에서는 
보호하고 가리며 
공급하고 덮어 주는 
사람이실 것이다. 
그분 아래 있을 때 
의와 보호와 누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천년왕국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의 
표현의 
첫 번째 방면은 
관용이다. 
빌립보서 4장 5절은
“여러분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 두 번째 방면은 
염려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에는 
관용이 있지만, 
염려나 근심은 
없을 것이다
(but no anxiety, no worry;
불안도 없을 것이고, 
걱정도 없을 것이다). 
바울은 
관용과 염려 없음을,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의 
표현의 
첫째가는 두 가지 방면으로
(as the first two aspects;
그 첫번째 두 측면들로)
여긴다.

사탄에게서 오는 
염려는 
인간 생활의 
총계이며
(the sum total; 총합, 모든 것, 전부), 
그리스도를 
사는 
믿는 이들의 생활을 
어지럽힌다
(disturbs; 방해한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관용은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의 
총계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반대된다
(are opposites; 
반대말들이다).

그리스도를 
사는 한 생활은 
잔잔하고 평온하며 
평화롭고 조용하다. 
반대로 
혼란된 생활은 
(a life of turmoil;
소동의 한 생활은)
사탄을 
사는 한 생활이다
(a life that lives Satan). 
관용은 
평온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관용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다
(reasonableness and considertaion;
사리에 맞음이고 또 배려이다). 
관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법적인 권리를 
엄격하게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to deal with others
without strictness of legal right;
법적인 권리의 엄격함 없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다).

관용하는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과 일치되고 
그들을 따를 수 있다
(can readily agree with
and follow others;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고[호응하고]
다른 사람들을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의견이 분분한 사람들이라면 
(dissenting persons; 
다른 의견을 내는[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없을 것이다
(will not be able to forbear with others;
다른 사람들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염려하게 될 것이다
(As a result,
we will have anxiety;
결과적으로,
우리가 걱정을 가질 것이다). 
평안을 가지고 
염려에서 해방되는 
길은 
(the way
to be at peace
and be release from anxiety;
평안에 있고 
걱정으로부터 풀려나는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to be forbearing with everyone;
각각의 모든 사람들을 견디는 것이다).

관용은 또한 
평안함과 
(peacefulness; 평화로움, 평온함, 조용함)
온유함과 
(mildness; 상냥함, 부드러움, 온순함, 유순함)
온화함을 
(gentleness; 예의 바름, 너그러움, 온순함, 유순함)
포함한다. 
만일 우리가 
사려 깊고, 
합리적이고, 
적합할 수 있다면
(if you are
reasonable, 
considerate, 
and able to fit in;
만약 여러분이
합리적이고,
사려깊으며,
또 어울릴[조화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의심할 바 없이 
온화하고, 친절하며, 
부드럽고, 평안할 것이다
(you will also be 
gentle, kind,
mild, and peaceful;
여러분은 또한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상냥하고, 또 평안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온순하고, 사려 깊으며, 
다른 이들에 대한 
동정이 가득할 것이다
(you will also be 
meek and moderate,
full of compassion for others;
여러분은 또한
온유하고 또 온건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이 가득할 것이다). 
앞의 메시지에서 지적했듯이, 
관용의 반대는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공정한 것이다
(the opposite of forbearance
is being just in 
a very exacting way;
관대함의 반대말은
오직 매우 엄하게 요구하는 
방식 안에 있음이다). 
관용이 부족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요구할 것이다
(will be 
exacting and demanding 
of others;
다른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또 과도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관용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적게 받아도 
쉽게 만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but to be forbearing
means that we
are satisfied with
less than our due;
하지만 관대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알포드(Alford)는 
관용에 대한 
헬라어 단어가 
법적인 권리와 관련해서 
엄격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우리의 것일지라도, 
우리는 
합법적인 권리에 따라 
엄격하게 그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but we do not claim it
according to strict, legal right;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엄격한, 법률상의 권리에 따라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관용이다.

빌립보서 각 장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다. 
그러나 4장에서는 
우리가 체험하는 
그리스도를 
(Christ in our experience;
우리의 체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관용이라는 
특별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빌립보서 4장이 
1장과 2장과 3장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4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체험하고 
우리를 통해 
관용으로 표현되시는 
그리스도를 본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 초점이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명백히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실지적인 체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초점은 
관용이다. 
관용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미덕들을 
포함한 것이다
(is an all-inclusive Christian virtue;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인의 한 미덕이다). 
그것은 
사랑과 인내와 
친절과 겸손과 
동정심과 사려 깊음과 
복종과 기꺼이 양보함을
(and submissiveness,
a willingness to yield;
또 순종, 
곧 기꺼이 복종함을)
포함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한 
이러한 (한) 미덕을 
가진다면, 
우리는 또한 
의와 거룩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염려가 없이 
관용으로 충만한 
생활이다. 
오직 우리가 
관용을 가질 때만이 
우리는 
염려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전 존재가 
관용으로 충만하다면, 
염려를 위한 
어떠한 여지도 
없을 것이다.

 

2일

레 3:8 
그는 
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회막 앞에서 
그것을 잡아야 하며, 
아론의 아들들은 
제단 위와 제단 주위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

빌 4:12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화목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야 했다. 
이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물이 
연결되는 것을 
(the union of …; 의 합일을)
상징한다.
‘연결’이라는 
(union; 
합일, 합병, 연합, 결합, 통합)
표현 대신에
‘동일시’라는 
(identification; 
동일하다는 증명, 신원 확인, 신분 증명, 식별)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손을 얹음으로
(through the laying on of hands;
손들을 위에 올려놓음을 통하여)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물과 
동일시되었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대치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시의 문제이다. 
그것은
연결보다 
더 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연결이라는 말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교통에 관한 
진리를 
완전히 전달해 주지 못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것은
동일시되는 문제, 
곧 우리가 그분이 되고 
그분께서 우리가 되시는 
문제이다.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이다. 
우리는 그분이 되고, 
그분은 우리가 되신다. 
…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대치되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대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문제이다.

빌립보서 4장에서 
언급된 것들을 
실행하려면 
신성한 생명이 
필요하다. 
바울은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비결을 배웠다(빌 4:13). 
4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뛰어난 부활을 
요구한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분 안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우리에게 
비결을 배울 것을 
요구한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각각의 일에 있어서’는
‘하나하나의 문제에 있어서’를
의미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를 
의미한다. 
이 둘을 함께 더하면 
인생의 과정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포함한다. 
바울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비결, 
곧 어떤 일에서나 어떤 곳에서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비결을 
배웠다.

빌립보서 4장 4절에서의
‘비결을 배웠습니다’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비밀 단체에 
입문하여
(being initiated; 
가입하여, 처음으로 접하여, 
비법을 전수받아, 기초지식을 얻어)
그 단체의 기본적인 원칙을 
배운 것을
(with instruction in its rudimentary principles;
그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에 관한 교육과 함께 
… 입문한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돌이킨 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입문하였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얻고, 
교회생활을 하는 
비결을 배웠는데, 
이 모든 것은 
기본적인 원칙들이다.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빌 4:6)
라고 한 바울의 말은 
이해하기가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하고 있다고 
…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하나님께’라는 어구를 
연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나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라고 
번역될 수 있다.
‘ …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프로스(pros)’인데
‘…와 함께’라고 
번역된다. 
이것은 
누군가를 향한 
동작을 나타내며, 
생생한 연결과 교제의 의미에서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다. 
…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하여 
기도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 안에는 
경배와 교통의 
요소가 있어야 하며, 
특별한 필요를 위한 
간구도 있어야 한다. 
특별한 필요가 없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날마다 
주님께 경배하고 
그분과 교통하기 위한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도 중에 
주님께 경배하고 
그분과 교통할 때, 
우리는 
그분과의 교제를 
누리고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결을 
실행한다.

주님과 유기적인 연결을 
실행한 결과이자 산물은 
바로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는 것이다(빌 4:7). 
하나님의 평안은 사실상 
기도로 그분과 교통할 때, 
우리 안에 주입된 
평안이신 하나님이다(빌 4:9).
이 평안은 
고민에 대한 안정제이고, 
염려에 대한 해독제이다(요 16:33). 
… 염려의 독소가 
여전히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에게는 해독제가 있는데, 
바로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우리 존재 안에 
옮겨 부어진 
하나님의 평안이다
(the peace of God;
하나님인 평안이다).

 

1일

레 3:1-2 
만일 그가 
바치는 제물이 
화목제물이고, 
그 제물을 
소 떼에서 골라 바치려면, 
수컷이든 암컷이든 
흠 없는 것을 
여호와 앞에 
바쳐야 한다. 
그는 
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회막 입구에서 
그것을 잡아야 하며, 
제사장들인 
아론의 아들들은 
제단 위와 제단 주위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

제물들에 관한 
레위기의 모든 말씀은 
작은 장막, 
곧 회막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었다. 
…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작은 회막은
점차적으로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해,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모든 방면은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과 
요제물과 거제물이신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제물들은 
결국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레위기에서 
제물들은 
특별한 순서로 
되어 있다. 
먼저 번제물이 있고, 
그다음에 소제물, 
그다음에 화목제물이 있다. 
번제물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소제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매일의 음식이신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인해 
살 때, 
그 결과는 
화목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지며 
서로서로 화목해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만족이 되실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화목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화목 안에 있으며, 
이 화목은 그리스도이다. 
… 그러므로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우리 서로서로를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한 
기본 제물들이다. 
이것이 
이 세 제물의 순서에 담긴 
의미이다.

그리스도 밖으로 나갈 때, 
우리는 
평안을 가지지 못한다. 
만일 우리에게 
평안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평안이 있는지는 
우리가 
얼마만큼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평안을 가지는 정도가, 
우리가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를 누리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안이 없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 
평안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평안을 얻으려고 애쓸수록 
우리는 
더욱더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평안을 얻는 
유일한 길은 
매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아침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하고 
그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려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매일의 음식으로 
취해야 한다. 
그것은 
그날의 특별한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려야 하며, 
어제나 내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야 한다.
어제는 지나갔으며, 
우리는 
내일에 있지 않다. 
어제는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어제에 
머물 수가 없다. 
우리가 
어제 실패했든 성공했든 
어제는 지나갔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내일이 없으며 
오직 오늘만 있다. 
내일로 인하여 
괴로워하지 말라. 
오늘을 살라! 
우리가 
오늘 가지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진다. 
그리스도가 오늘이시다.

화목제물은 
누가복음 15장 23절과 24절에서 
영접하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돌아온 탕자인 
죄인 사이에 
화평의 누림을 
가져다주는 
살진 송아지가 
예시해 주고 있다. 
탕자는 
비참한 상태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였고 
즉시로 
영접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탕자를 영접한 후에 
그들의 누림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 
이 살진 송아지는 
우리를 영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누림을 위해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예시이다. 
아버지와 
돌아온 탕자는 
화목제물을 
풍성하게 누렸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께서 
번제물로 인하여 
만족하신 것에 
기초를 둔다. 
하나님과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화목제물은 
그리스도께서 
번제물이 되신 것에 
기초한다. 
이것은 
레위기 3장 5절과 6장 12절에 
나타나 있다. 
화목제물에 대해 말하는 
레위기 3장 5절은
“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에 놓은 
장작 위의 
번제물에 얹어 
불태워야 한다. 
이것이 
화제이며 
여호와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화목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기초가 
번제물이라는 것을 본다. 
번제물을 태우는 것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은 
화목제물을 받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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