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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왕국의 훈련

The Exercise of the Kingdom
for the Building Up of the Church
그 교회의 그 건축함을 위한
그 왕국의 그 훈련(실행, 실천, 연습, 실습)

마태복음 16장은
교회를 건축하는 길을 계시하며,
또한 건축의 원수를 계시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반석이신 자신 위에,
변화된 사람인
베드로와 같은 돌들로
교회를 건축하신다
― 마 16:16-18.

음부의 문들,
곧 사탄의 권세
혹은 어둠의 세력은
주님께서
교회를 건축하시는 것을
좌절시키려고
교회를 공격한다
― 마 16:18.

교회를 건축하시기 위해
주님은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셔야 했다
― 마 16:21.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산출되었다
― 요 12:24.

교회를 건축하는 길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는 것이다
― 고후 4:10-12, 갈 2:20.

교회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하여,
부활의 영역 안에서만
존재하고 건축된다
― 창 2:21-22, 엡 4:15-16.

베드로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책망하면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 마 16:22.

주님께서
교회를 건축하시려는 것을
좌절시키려고 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바로 음부의 문들 중 하나인
베드로의 자아라는
문을 통해 나온
사탄이었다
― 마 16:23.

자아와 생각과 혼 생명은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고 손상하기 위해 나오는
주된 문들이다
― 마 16:23-26.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세 가지 열쇠를 사용함으로
음부의 문들을 닫는 데
달려 있다
― 마 16:24-26.

우리는
자아 부인이라는 열쇠를
사용하기를 배워야 한다
― 마 16:24.

육체는
창조된 몸이
사탄의 본성인 죄로 인해
부패한 것이다
(롬 6:12, 14, 7:8, 11, 17, 20).
자아는 창조된 혼에
사탄적인 생각, 곧 사탄의 생각이
더해진 것이다.

사탄의 생각, 사탄의 사상이
사람의 혼 안에 주입되었을 때,
사람의 혼은
사탄의 체현인
자아가 되었다
― 창 3:1-6, 마 16:22-23.

하와가
선과 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자신의 몸 안에 받아들이기 전에,
사탄의 사상, 사탄의 생각이
하와의 혼 안에 주입되었다.

하와의 생각이
사탄의 사상으로 중독된 후에
그녀의 감정이 동요되었고,
그런 다음에 하와는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혼의 각 부분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중독되고 말았다.

자아는
혼 생명의 체현이고,
자아는
생각을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자아와 혼 생명과 생각은
하나 안의 셋이다.

이 셋의 배후에는
교회를 손상하기 위해
자아를 조종하는
사탄이 있다
― 마 16:23.

자아는
하나님에게서
독립을 선포하는
혼이다.

주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중시하시기보다,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는지를
중시하신다
― 마 7:21-23, 수 9:14.

몸의 원수는
자아이다.
자아는
독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자아가 바로
몸을 건축하는 것을
가장 크게
좌절시키고
반대하는
가장 큰 문젯거리이다.

1)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뿐 아니라
몸, 곧 형제자매들을
의지해야 한다
― 출 17:11-13, 행 9:25, 고후 11:33.

2) 주님과 몸은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가
몸을 의지한다면
또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우리가
몸에게서 독립한다면
자연히 주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다.

3) 우리가 의존적일 때
자아가 사라지며,
자아 대신에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가지고
평안으로 가득하게 된다.

4) 자아 생명이
십자가로
완전히 처리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만질 수 있고
몸을 알게 된다.

다음의 것들은
자아의
여러 표현들이다
(찬송가 628장, 5-6절).

자아에는
야심과
교만과
자기를 높임이 있다
― 마 20:20-28, 벧전 5:5, 롬 12:3,
민 12:1-10, 16:1-3, 빌 2:3-4.

자아에는
자기 의(義),
자기 정당화,
다른 이들을
폭로하고
비판하고
유죄 판결하는 것이 있다
― 마 9:10-13, 눅 18:9-14, 벧전 4:8,
요 3:17, 8:11, 눅 6:37, 마 7:1-5.

자아에는
자기 성찰과
자기 비하가 있다
― 아 2:8-9, 고전 12:15-16.

자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교회나
인도하는 이들이나
성도들로 인하여
마음이 상할 수 있다
― 마 6:14-15, 18:21-35,
막 11:25-26, 골 3:13.

자아에는
실망과 낙심이 있다
― 롬 8:28-29, 고후 4:1.

자아에는
자기 사랑,
자기 보존,
자기 추구,
자기 연민이 있다
― 마 13:5, 20-21.

자아에는
불평과 따짐이 있다
― 출 16:1-9, 빌 2:14.

자아에는
타고난 기호와 선호에 근거한
타고난 애정(우정)이 있다
― 마 12:46-50, 빌 2:2하, 고전 12:25.

자아에는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문제들이 있다
― 요 11:21, 23-28, 39,
행 15:35-39, 고전 7:25, 40.

자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이다
― 고전 16:12.

우리가
자아 부인이라는
열쇠를 사용하여
자아를 잠가 버린다면,
우리는 결코
마음이 상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상하지 않는 이들은
복이 있다
― 눅 23:34, 행 7:60.

우리가
마음이 상할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자아로 가득하다는
증거이다.

나의 자아가 잠겼다면,
여러분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하든지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상관없이,
나는
마음이 상하지 않을 것이다
― 눅 23:34, 행 7:60.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자아의 문을 잠그기 위해
자아 부인이라는
열쇠를 사용하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상황이
여러분을 위하든지 반대하든지,
형제들이
여러분을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여러분은 반드시
자아의 문을
잠가야 한다
― 고후 12:15.

자아의 문이 잠긴다면
교회는 건축될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짐’이라는 
열쇠를 사용하기를 
배워야 한다
― 마 16:24.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다 
― 마 26:39, 요 18:11.

주 예수님은 
범죄자처럼 억지로 
십자가에 가신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자원하여 
십자가로 가셨다 
― 마 26:39.

주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것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 
그분의 생명을 해방하여 
교회를 
산출하고 
건축하시기 위해서였다 
― 요 12:24.

십자가는 
주님께 
큰 고통이었지만, 
주님은 
그 고통을 개의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관심하셨다 
― 히 12:2, 골 1:2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 16:24)
라는 말은 
우리가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이며 
따라서 우리의 십자가이다.

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 안의 모든 형제자매들도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진정한 하나를 가지기 위해 
교회를 짊어지고 
모든 성도들을 짊어지는 것이다 
― 요 17:21-23, 엡 4:3, 13, 
고전 1:10, 빌 2:2.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질 뿐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다녀야 한다. 
즉 십자가에 머물면서, 
날마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의 종결시킴 아래 
두어야 한다 
― 눅 14:27, 롬 6:6, 갈 2:20, 
빌 3:10, 고전 15:31.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 
신성한 생명을 받았다. 
이제 이 생명 안에서 
건축되기 위해, 
우리는
자원하여 
기쁘게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취향이나 느낌이나 의식을 
주의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만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진정한 하나를 가지는 것이다 
― 요 17:21-23, 엡 4:3, 13, 고전 1:10, 빌 2:2.

우리는
‘혼 생명을 잃어버림’이라는
열쇠를 사용하기를
배워야 한다
― 마 16:25.

혼 생명을 구하는 것은
혼이
자신의 누림을 얻도록
허용함으로써
자아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혼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혼의 누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누림을 필요로 하는
혼으로 창조하셨다
(창 2:7).

하나님을
사람의 영 안에 받아들이고
혼을 통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의 기쁨과 오락이어야 한다
― 느 8:10, 롬 14:17.

주 예수님은
오는 시대에서
그분의 혼 생명을
얻으시기 위해
이 시대에서
그분의 혼의
누림을 잃으셨다
(요 10:11, 사 53:12).
우리도 반드시 동일하게 행해야 한다
(요 12:24-26).

우리가
이 시대에서
우리의 혼 생명을 구한다면,
오는 시대에서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대에서
우리의 혼 생명을 잃는다면,
오는 시대에서
그것을 얻을 것이다
― 마 16:25.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의 혼 생명을
미워하고
부인해야 하며,
죽기까지
우리의 혼 생명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 고전 16:22, 2:9,
눅 14:26, 9:23, 계 12:11.

우리가
주님과
교회와
모든 성도들을 위해
우리의
현재의 혼적인 누림을 모두
기꺼이 잃어버리고자 한다면,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서
양육을 받을 것이고
우리를 통해
건축될 것이다.
이것은
고난이 아니라
기쁨이다
― 히 12:2.

왕국이 나타날 때
이 땅을 통치하시는
왕의 기쁨에 참여하는
왕국 보상을 얻는 것은
우리가
이 시대에서
우리의 혼 생명을 구하는지
아니면 잃어버리는지에
달려 있다
― 마 16:25-28, 25:2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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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마 16:25-26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혼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혼 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 생명을 잃으면
혼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그 대가로
자기 혼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혼 생명과 바꾸겠습니까?

혼 생명을 구하는 것은
혼이 누림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는
혼 생명의 표현이고,
혼 자체는 누림이다.
혼 생명을 잃는 것은
혼의 누림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혼 생명을 잃는 것과 관련하여,
주님은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일에
약간의 체험이 있다면,
겉으로 보기에
혼 생명을 잃는 것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참된 기쁨임을
알 것이다.
한 자매가
남편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의 혼 생명을 잃는다면,
그것은
그 자매와 그 가정에
기쁨이 된다.
그것은
합당한 가정생활을 세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교회 건축에 있어서도
원칙상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혼적인 누림을 잃는 것은
기쁜 일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교회 건축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분이
기꺼이 혼 생명을 잃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에 의해
영양 공급을 받고
여러분을 통해
건축될 것이다.
이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주님께서
그분 앞에 놓여 있는
기쁨 때문에
십자가를 견디셨다고
말한다.
… 주님은
기쁨으로 가셨다.
그분께서
십자가로 가신 것은
자신의 혼 생명을
잃으신 것이었다.
…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많은 밀알들이 산출될 것을
아셨다
(요 12:24).

사람들이
하나님 밖에서 구하는
모든 오락들은
혼의 만족을 위한다.
음악을 듣거나
어떤 운동을 즐길 때
그들은 행복하다.
홍콩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마작을 좋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최고의 오락이요 누림이다.
… 영 안에서 거듭났지만
여전히 마작 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님께서 오실 때
결국 그의 혼 생명을 잃을 것이다.
…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마작 놀이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혼 생명을
잃어야 한다.
지금 혼 생명을 잃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것을 잃을 것이다.
주님은
그에게
“너는
너의 혼 생명을
아주 많이 구했으니,
이제는
그것을 잃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 혼 생명을 구하는 것은
혼의 누림을 보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셨을 때,
그분은 거절당하셨다.
이 현시대,
곧 교회 시대는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시대이다.
그리스도께서
거절당하셨기 때문에,
현재 이 땅에서
그분께는
어떤 기쁨도 없으시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이들로서
그분과
운명을 함께한다.
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로서,
우리의 운명은
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거절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우리가
우리의 혼의 누림을
가지는 시대가 아니라
그 누림을 잃는 시대이다.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때가 바로
그분께서
땅을 누리실 때일 것이다.
사탄은
결박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땅을 회복하실 것이고,
온 땅은
그분의 통치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리스도는
땅을 누리실 것이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그 누림에 동참할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
21절과 23절의 의미이다.
이 두 절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잘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노예야.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내가
많은 일을
너에게 맡길 것이다.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여라.”
이러한 일은
주 예수님께서
땅을
되찾으시고
누리시는 때인
천년왕국 동안에
일어날 것이다.
주님은
땅을 다시 소유함으로써
누림을 가지실 것이다.
그때에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
곧 그분의 동반자들에게
그분의 기쁨에 참여하라고
하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혼의
구원일 것이다.
우리가
오는 시대에서
누림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 시대에서
우리의 혼 생명을 잃음으로써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
당신을 위해
저는
그렇게 많은 즐거움이나 오락을
누리기 원치 않습니다.”
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은
한 형제에게
얼마만큼의 돈을
다른 형제에게 주라는
부담을 주셨다.
그러나 원수는
금액을 낮추도록
그를 유혹했다.
그 형제가
빛 비춤을 받아
원수의 책략을 보았을 때,
그는
“사탄아,
네가 이것에 관해
또다시 내게 말한다면,
나는
모든 것을 넘겨주겠다.
나의 예금 계좌에
한 푼도 없어도
나는 기쁘다.”
라고 말했다.
거액의 예금 계좌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잃는 것은
우리의 혼 생명을 잃는 것이다.

 

5일

마 16:24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마 26:39 
…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리셔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십자가는 
고통을 당하는 문제이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로마 정부가 
죄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십자가는 
범죄자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그는 
강제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전적으로 달랐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하도록 
강요받지 않으셨다. 
그분은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이것은 
그분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분은 
어쩔 수 없이 
십자가로 가신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기꺼이 
그렇게 하셨다. 
따라서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고,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범죄자처럼 
십자가에서 죽도록 
강요당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것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 
그분의 생명을 해방하여 
교회를 산출하시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 계셨을 때 
몹시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 고통은 
그분께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그것을 
기꺼이 선택하셨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서 
주님은 
아버지께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하셨다. 
그분은 
또다시 기도하실 때도 
동일한 말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42절)
라고 기도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로 가셨으며, 
십자가 위에 머무르셨다. 
이것이 
성경에서 
십자가가 
첫 번째로 언급되었을 때 
내포되었던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가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그것을 취해서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그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고”
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점을 
주목하라.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형제들은 
“나는 많은 때 
아내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 형제들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에 의해 
처형되는 범죄자들이다. 
자녀들이 
여러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이가 아니라 
처형되는 범죄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처형되고 있는 범죄자들이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겠다. 
여러분은 
범죄자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인가? 
우리 모두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저는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십자가를 선택해서 
짊어집니다.”

어떤 형제가 
아내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이혼도 
결코 허락되지 않으므로 
그에게는 
그녀에 대해 
두 가지 선택이 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고 있는 
범죄자처럼 
아내로 인해 
고통 당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내를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몫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나에게 안배해 주셨다. 
그녀와 결혼하게 하신 분은 
내가 아니라, 
그녀를 내게 주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정하심이다. 
할렐루야! 
나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십자가를 짊어진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라 
기쁘게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주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것이고, 
우리는 
생명의 풍성을 
누릴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는 
하나로 건축되는 
강한 증거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회들 안에서 
성도들 가운데 
어떤 선택을 가진다면, 
우리는 
사탄이 나오게 하는 
넓게 열린 대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두 번째 열쇠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당신의 뜻은 
우주 안에 
한 교회가 있고, 
각 도시마다 
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뜻은 또한 
제가 
모든 형제자매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믿는 이라면, 
저는 
선택이나 선호가 없이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건축되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선호와 기호는 
끊임없이 요동칠 것이다. 
오늘은 
내가 
여러분에 대해 
긍정적으로 느낄지 모르지만, 
내일은 
부정적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교회 생활과 결혼 생활에는 
어떤 요동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견고하고 
변함없도록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4일

눅 23: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

빌 2:3
어떤 일도
이기적인 야심으로 하지 말고,
헛된 영광을 위해 하지 말며,
오직 생각을 낮추어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마음이 상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무심코
“나는
교회생활 안에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장로들과 다른 인도하는 이들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라고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할지라도
여러분은 항상
먼저 견디어야 한다.
한편으로 나는
마음을 상하게 하는
모든 것을 책망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여러분은
마음이 상하게 된 것에 대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내가
자아를 잠그는
자아 부인이라는
열쇠를 사용한다면,
마음이 상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상하게 되는
이유는
자아가
너무 열려 있고
강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열린 문을 통해
사탄이 나오고,
따라서 우리는
마음이 상하게 된다.

교회가
옳든 그르든
그것은
여전히 교회이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나
누군가에 의해
마음이 상할지라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
어떤 핑계도 대지 말라.
이것은
교회 건축을 좌절시킨다.

우리가
건축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우리를 만지는
어떤 일들이
발생할 때에는
자아가 열린다.
우리가
음부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음부로부터
어떤 것이 나온다.
곧 사탄이 나온다.
자아를 걸어 잠그는
자아 부인이라는 열쇠를
얼마나 사용해야 하는지!
… 마음이 상하지 않는 이들은
복이 있다!

마음이 상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어떤 핑계도 있을 수 없다.
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그분의 심판대에 세우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과 결산하자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곳에서
왜 마음이 상하게 되었는지를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위해 변명한다면,
주님은
그 변명을
용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문제는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이다.
… 여러분의 마음이
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아로 가득하다는
증거이다.
나의 자아가 잠겨 있다면,
여러분이
나에게 무엇을 하든,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마음이 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교회들 안에
형제의 집과
자매의 집이
있는 것이
기쁘다.
그렇지만 우리는
체험을 통해
그러한 집에서 살 때,
두 종류의 결과가 있음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천연적인 우정을 형성하고,
어떤 사람들은
불만족하고
실망하게 된다.
… 실망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자아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 자아의 문이 잠긴다면,
우리에게
건축이 있게 될 것이다.
자아 부인이라는
열쇠를 사용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마음이 상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마음이 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여러분 안에 있는
자아가 잠겼기 때문에
여러분은
건축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아 부인이라는
효과적인 열쇠를 사용하여
자아와 혼 생명과 생각을
잠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 건축은
좌절될 것이다.

자기 확신을 가지지 않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가
자기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지는
연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확신이
육체에 속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 ‘자기 의(self-righteousness)’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자기 정당화(self-justice)가 아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자기 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
자신은 결코
잘못이 없고
항상 옳다고
생각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한다.
… 자기 정당화는
육체의
또 다른 특징이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시키려 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다.
… 자기를 높이는 것은
육체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 확신과
자기 의와
자기 정당화와
자기변호와
자기를 높이는 것이
모두
육체의 방면들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도들이
교회 봉사에서
자기 확신과
자기 의와
자기 정당화와
자기변호와
자기를 높이는 것을
유죄 판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 봉사에는
자아에 속한
어떤 것도 없어야 한다.
우리에게
자아의 이런 방면들이 있을 때,
우리는
완전히 육체에 속하게 되며,
거룩한 바르는 기름이신
그 영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신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매우 확신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정당화하고
변호하며
스스로를 높인다면,
우리는
그 영을 잃게 된다.

 

3일

고전 12:20-21
그러나 이제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라고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아는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혼이다.
혼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일 때
그 혼은 즉시
자아가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어떤 것을 할 때마다
자아 안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에게서 독립적이라면
자아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혼인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되어 있었다.
사람은
혼이며
(창 2:7),
혼인 사람은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혼은
자아가 되었다.
자아는 바로
하나님에게서
독립을 선포하는
혼이다.
우리가
자아에 대한
이상을 보았다면
자아가 무엇인지를
보았을 것이다.
자아는
하나님에게서
독립을 선포하는
혼이다.
이 이상을 본다면,
더 이상 하나님에게서
독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저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제가 무엇을 하든,
어떠한 사람이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자아는
독립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몸의 건축에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뿐 아니라
몸, 곧 형제자매들을
의지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에게서
독립적일 때,
우리는
자아
곧 독립적인 혼 안에
있게 된다.
오늘 우리가
몸에게서 독립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이다.
우리의 체험을 살펴본다면,
형제자매들에게서 독립적일 때
하나님에게서도 독립적이라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형제자매들에게서 고립되어 있을 때
하나님에게서도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주님께 의존적이려면
몸에 의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몸에 의존적이라면
주님께 의존적일 것이다.
여러분은
왜 주님의 임재에 대한
깊은 느낌이 없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몸에게서 고립되어 있고
몸의 지체들과
합당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임재가 없는 것이다.
건축되기를 힘쓰고
몸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기를 힘쓰라.
몸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몸 안에 건축될 때,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본다면
우리는
행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주님을 의지하는지를
주의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주님께 독립적인가
아니면 의존적인가?
우리가
주님께 독립적이라면
자아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 의존적이라면
자동적으로
몸에 의존적일 것이다.

주님과 몸은
하나이다.
우리가
주님께 의존적이라면
몸에 의존적이고,
몸에 의존적이라면
주님께 의존적이다.
몸에게서 독립적이라면
자동적으로
주님께 독립적이며,
선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려고 했든지 간에
여전히 자아 안에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아 안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사탄과
한 회사로 병합되었다.
이 회사 안에서
자아는
지배인이고
사탄은
회장이다.

오, 우리는
자아에 대한 이상을
얼마나 보아야 하는지!
이 이상을 본다면,
주님과 몸에게서
독립적인 것을
미워하고,
몸과 형제자매들과 주님께
의존적이 되는 것을
사랑할 것이다.

몸의 원수는
자아이다.
몸에 대한
가장 큰 문제와
가장 큰 좌절과 반대도
자아이다.
자아가 있다면
몸은 없다.
몸이 있다면
자아는 없는 것이다.
몸이 건축되기 위해
자아,
곧 독립적인 혼은
반드시 처리되어야 한다.
자아는
독립적인 ‘내가’이며
독립적인 ‘나를’이다.
독립적일 때
우리는
자아 안에 있고,
몸은
사라지며,
평안은
없어진다.

 

2일

마 16:23-25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거라.
너는
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다.
왜냐하면 네가
생각을
하나님의 일에 두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에 두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혼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혼 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 생명을 잃으면
혼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볼 때,
교회는
유대교나 영지주의에 의해
손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주로 자아에 의해
손상을 입었다.
언젠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가 교황을 두려워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더 강한 교황, 즉 자아를
더욱 두려워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것도
자아보다 더
교회 건축을
손상하고 좌절시키는 것은 없다.
자아는
혼 생명의 체현이고,
자아는
생각을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자아와 혼 생명과 생각은
‘하나 안의 셋’이다.
이 셋의 배후에는
교회생활을 손상하기 위해
자아를 조종하는
사탄이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성도를
우리의 형제자매로 여기고
그 누구도
우리의 친구로 여기지 않도록
주님의 긍휼을
얻어야 한다.
주님의 건축을 위해
교회생활 안에서
천연적인 모든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
어떤 천연적인
애정이나 관계나 느낌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천연적인 애정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것을
피해야 한다.
어떤 형제가
나를
천연적인 애정으로 사랑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란다.
그때는 내가
자아를 부인하는
열쇠를 사용할 때이다.
나는
나 자신을 걸어 잠그고,
그 형제의 천연적인 애정을
피할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형제의 자아를
살찌우고 있고
그가
여러분의 자아를
살찌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여러분은 반드시
자아의 문을 걸어 잠그는
열쇠를 사용해야만 한다.
만일 여러분이
자아를 걸어 잠그지 않는다면,
사탄이
자아의 문을 통해
나올 것이다.

창세기 3장 1절 하반절에서
사탄은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정말로
‘너희는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의 열매도
먹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하셨어요?”
라고 물었다.
이것이
하와의 생각 안으로 넣어진
질문이었는데,
이 질문이
그녀의 생각에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우리가 강조해야 할
중점이다.
사탄은 항상
사람들의
의심하는 생각을 만짐으로써
그들에게 접근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사탄은
하나님에 관해
무언가를 질문했는데,
이러한 질문은
의심할 바 없이
하와의 생각을 자극했다.

사탄은
여자의 생각을 만지기 위해
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창 3:4).
… 이것은
뱀의 독이
그녀의 생각 안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탄의 말이
그녀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말이
사람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격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람의 생각은
중독되었고 오염되었다.

사탄은 또한
하나님을 싫어하도록
사람의 감정을 자극했다.
이것은
창세기 3장 5절로 입증되는데,
이 절에서 사탄은
하와에게
“하나님은
그대들이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열려서
하나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줄 아시고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에요.”
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싫어하도록
하와의 감정을 자극하는
악한 말이었다.
아마도 하와는
하나님께서
무언가 좋은 것을
그녀에게
비밀로 해 두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감정에
독을 집어넣는
원수의 간교함이다.

사탄은
지식나무를 선택하도록
사람의 의지를 부추겼다.
창세기 3장 5절에서
사탄의 말이 있은 후에,
6절은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기에
좋고
보기에
즐거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의 의지를 부추겨서
선과 악의 지식나무를 먹도록
결정하게 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사탄은
사람의 혼 전체를 더럽혔다.
곧 생각과 감정과 의지 전체를
더럽힌 것이다.
생각이 중독되었고,
감정이 중독되었으며,
의지 또한 중독되었다.
이렇게 해서
혼 전체가 더럽혀졌다.

 

신언노트, 2019 06 09

그 교회의 그 건축함을 위한
 그 왕국의 그 훈련(실행, 실천, 연습, 실습)

마태복음 16장은
 그 교회를 건축하는
 그 길을 계시하고,
 또한(and also) 그 건축물의
 그 적을 계시합니다:

그리스도,
 그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그 아들께서,
 그 반석이신
 그분 자신 위에
 그 교회를 건축하시는데,
베드로,
 곧 한 변화된 사람과 같은
 돌들로 (건축하십니다).

음부의 그 문들,
 곧 사탄의 권세
 (authority; 권위)
 또는 어둠의 세력은,
그 교회를 건축하심에서부터
 주님을 좌절시키려고
 (to frustrate; 방해하려고)
 그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 교회를 건축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죽음을
 통과하셔야 했고
 또 부활 안으로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또 부활을 통하여
 산출되었습니다.

그 교회를 건축하는
 그 길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한
 부활의 그 영역 안에서만
 존재하고
 또 건축됩니다.

베드로는,
 한 선한(good)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책망하였고,
또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부터
 주님을 막으려고 시도했습니다
 (tried; 애썼습니다):

그 교회를 건축하심으로부터
 주님을 좌절시키려고
 시도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음부의 문들 중 하나,
 곧 베드로의 자아의(of; …인[라는])
 그 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온(came out)
 사탄이었습니다.

그 자아, 그 생각, 또 그 혼-생명은
 이를 통하여(through which)
 사탄이
 밖으로 나와서(comes forth)
 그 교회를
 공격하고
 또 손상시키는
 그 주된(main) 문들입니다.

그 교회를 건축함은
 세 열쇠들의
 그 사용을 통하여
 (through the exercise;
 그 훈련[실행, 구사, 운용]을 통해)
 음부의 그 문들을 닫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자아를 부인함의
 그 열쇠를 사용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 육체는
 죄, 곧 사탄의 그 본성에 의하여
 부패된
 (corrupted;
 더럽혀진, 타락하게 된)
 그 창조된 몸입니다;
그 자아는
 그 창조된 혼
 더하기(plus)
 그 사탄적인 생각,
 곧 사탄의 그 생각입니다.

사탄의,
 그 생각, 곧 그 사상이
 사람의 그 혼 안으로
 주입되었을 때,
사람의 그 혼은
 그 자아,
 곧 사탄의 그 체현이
 되었습니다:

하와가(Eve; 이브가)
 선과 또 악의
 그 지식의 그 나무의
 그 열매를
 그녀의 몸 안으로
 취했던 것보다 먼저
 (Before … took;
 먹기[넣기, 가져가기] 전에),
사탄의
 그 사상, 곧 그 생각이
 그녀의 혼 안으로
 주입되었습니다.

하와의 생각이
 사탄의 사상에 의하여
 중독되었던 것 다음에
 (After … was poisoned;
 중독된 후에)
그녀의 감정이
 깨워졌고
 (was aroused;
 각성[자극, 분발, 환기, 분기]되었고),
또 그 다음에(then)
 그녀의 의지가
 사용되었으며
 그 결과(to)
 지식의 그 나무의
 그 열매를(of; …에서, …의 일부를) 먹는
 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to make; 만들었습니다).

이때까지
 (By this time; 이때)
 그 혼의 각각의 모든 부분들이
 ―그 생각, 그 감정, 또 그 의지가―
 중독되었습니다.

그 자아는
 그 혼-생명의 그 체현이고,
이는
 그 생각을 통하여
 표현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 자아, 그 혼-생명, 또 그 생각은
 하나-안의-셋입니다
 (three-in-one).

이 셋의 뒤에
 사탄이 있는데,
이는
 (who; 그는)
 그 교회를 손상시키기 위하여
 그 자아를 교묘하게 다룹니다
 (manipulates; 조종[조작]합니다).

그 자아는
 하나님께로부터의 독립을
 (independence; 자립을)
 선포하는
 그 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무엇에 대한
 (for; …을 위한)
 존중을
 (regard;
 높은 평가를, 고려를, 배려를,
 관심을, 주의를, 주목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그분 위에의 의존에 대한
 (for … dependence on Him;
 … 의지[신뢰]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몸의 그 적은
 그 자아입니다;
그 자아가
 독립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 자아는
 그 몸을 건축함에 대한
 (to …; …건축함에의),
 그 가장 큰 문제,
 곧 그 가장 큰
 좌절과
 (frustration;
 좌절감을 주는 것과, 방해물과)
 또 반대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 위에뿐 아니라
 또한 그 몸 위에,
 곧 형제들과 또 자매들 위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2) 주님과 또 그 몸은
 하나입니다;
이렇게 하여,
 만약 우리가
 그 몸 위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또한
 주님 위에 의존하고,
또 만약 우리가
 그 몸에게서(of) 독립적이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spontaneously; 자발적으로)
 주님께로부터 독립적입니다.

(3) 우리가 의존할 때,
 그 자아는 사라지고
 (is gone; 끝나고),
 또 그 자아 대신에,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가지며
 또 평안으로 충만합니다.

(4) 오직 그 자아-생명이
 그 십자가에 의하여
 완전히 처리되었을 때에만
 (has been … dealt with)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를
 접촉할 수 있고
 또 그 몸을 알게 됩니다
 (come to know …;
 …을 알기에 이릅니다).

다음에 오는 것들은
 그 자아의
 어떤
 (some; 몇몇의)
 표현들입니다
 (찬송가 628장, 5-6절).

그 자아와 함께
 야심,
 교만,
 또 자아-높임이
 (self-exaltation;
 자기-의기양양[엄청난 기쁨, 행복감]이)
 있습니다.

그 자아와 함께
 자아-의(義),
 자아-정당화,
 또 다른 사람들을
 폭로함,
 비판함,
 또 유죄 판결함이
 있습니다.

그 자아와 함께
 성찰과
 (introspection;
 내관과, 안으로 봄과, 자기 성찰과)
 또 자아-멸시가
 (self-despising;
 자기-업신여김이[깔봄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자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 교회,
 그 인도하는 사람들,
 또는 그 성도들에 의하여
 마음이 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자아와 함께
 실망과
 또 낙담이
 (discouragement;
 낙심이, 단념시킴이, 용기를 잃게 함이)
 있습니다.

그 자아와 함께
 자아-사랑,
 자아-보호
 (self-preservation;
 자기-보존[지킴, 유지]),
 자아-추구함,
 또 자아-연민이
 (self-pity;
 자기-동정[불쌍히 여김]이)
 있습니다.

그 자아와 함께
 중얼거림들과
 (murmurings;
 투덜거림들과, 불평함들과)
 또 추론들이
 (reasonings;
 이치를 따져 납득시킴들이,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설득함들이)
 있습니다.

그 자아와 함께
 타고난 취향과
 (taste;
 기호와, 입맛과)
 또 선호에 기반한
 (based on)
 타고난 애정(우정)이
 있습니다.

그 자아와 함께
 자기 의견을 고집함과
 (being opinionated;
 독선적임과)
 또 의견을 달리함의
 (dissenting;
 반대함의)
 그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자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또 독립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자아를 부인함의
 그 열쇠를 사용하여
 그 자아를 가둔다면
 (to lock up;
 잠근다면),
우리가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지 않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is blessed;
 축복받습니다, 은혜를 입습니다, 신성합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이 상하게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아로 충만하다는
 증명입니다
 (is proof;
 증거입니다).

만약 나의 자아가
 가두어졌다면
 (has been locked up),
여러분이
 나에게
 무엇을 하든지
 또는 여러분이
 어떻게 나를 대하든지
 상관없이(no matter),
나는
 마음이 상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아를 부인함의
 그 열쇠를 사용하여
각각의 모든 상황들 안에서
 그 자아를 가두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한 상황이
 여러분을 위하든지
 또는 반대하든지(Whether),
그 형제들이
 우리를 사랑하든지
 또는 미워하든지,
우리는 반드시
 그 자아를
 가두어야만 합니다.

만약 그 자아가 가두어진다면,
 그 교회가 건축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짐의
 그 열쇠를 사용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단순히
 (simply; 
 간단히, 그저, 다만, 단지)
 하나님의 그 뜻을 
 지는 것을
 (to take up;
 받아들이는[시작하는, 회복하는, 집어올리는, 
 태우는, 들이는, 흡수하는, 인수하는,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한 범죄자처럼
 그 십자가로 가시도록
 강제되지 않으셨습니다
 (was not forced;
 강요받지 않으셨습니다, 
 억지로 시켜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기꺼이 가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 결과(so that)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생명이 해방되어
 그 교회를
 산출하고
 또 건축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might).

그 십자가는
 주님께 
 한 큰 고통을 겪음이었지만,
그분께서는
 그 고통을 겪음을
 관심하지 않으셨고
 (cared not for;
 개의치 않으셨고)
 오직 하나님의 목적의
 그 성취만을
 (관심하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 그의 십자가를 지고”
 (마 16:24)는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짊어지도록(to bear)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기꺼이
 그것을 진다는 것을(take it up)
 의미합니다.

우리의 
 남편, 아내, 또 아이들은
 하나님의 뜻이고
 또 따라서(and … therefore)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 하나의 교회는
 (The one church;
 하나의 그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고,
 또 그 교회 안의
 각각의 모든 형제들과 또 자매들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그 교회를 짊어지는 것이고
 또 그 모든 성도들을 짊어지는 것이며
그 결과(so that)
 우리는
 그 진짜 하나임을
 가질 것입니다(would have).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뿐 아니라
 (not only to take up;
 질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십자가를
 가지고 다니는
 (to carry; 가지고 다닐),
 즉, 그 십자가 위에 머무르며,
 날마다
 그 십자가의 그 끝냄 아래에
 (under the termination;
 그 종결[종료] 아래에)
 우리의 옛사람을 계속 있게 하는
 (keeping;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하여
 그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이 생명 안에서
 건축되기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또 즐겁게
 (willingly and happily;
 자진해서 또 행복하게)
 그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취향, 느낌, 또는 의식을
 관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관심해야 하고,
이는(which)
 우리가
 그 진짜 하나임을
 가지는 것입니다
 (that … would have;
 가질 것임입니다).

우리는
 그 혼-생명을 잃어버림의
 그 열쇠를
 사용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 혼-생명을 구하는 것은
 (To save;
 구출하는 것은, 남겨 둠은, 아낌은,
 면하게 함은, 보류함은)
 그 혼이
 그것의 누림을 가지도록
 허용함에 의하여
 그 자아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 혼-생명을 잃는 것은
 그 혼의
 그 누림을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누림에 대한
 (for; …을 위한)
 그 필요를 가지는
 (with; …와 함께하는)
 한 혼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영 안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임과
 또 그 혼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함이
사람의
 기쁨과
 또 오락이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그 오고 있는 시대 안에서
 그분의 혼-생명을
 되찾으실 수 있도록
 (so that … might find;
 다시 찾으실 수 있도록, 얻는 데 성공하시도록)
이 시대 안에서
 그분의 혼의
 그 누림을
 잃으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동일한 것을
 (the same)
 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시대 안에서
 우리의 혼-생명을 구한다면,
 그 오고 있는 시대 안에서
 그것을 잃을 것이지만,
만약 우리가
 이 시대 안에서
 우리의 혼-생명을 잃는다면,
 그 오고 있는 시대 안에서
 그것을 되찾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할
또 우리의 혼-생명을
 미워하고
 또 부인하면서,
 죽음에 이르도록
 우리의 혼-생명을
 사랑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그 교회를 위하여,
 또 그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현재의 혼적인 누림을
 기꺼이 잃어버리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의하여
 영양분을 공급 받을 것이고
 또 우리를 통하여
 건축될 것입니다;
이것은
 한 고통을 겪음이 아니고
 오직 한 기쁨입니다
 (but a joy;
 오직 한 환희입니다).

그 왕국의 그 나타남 안에서
 그 땅 위에 다스림 안에 있는
 그 왕의 기쁨을
 공유함의
 (sharing;
 함께 씀의, 나누어 가짐인, 나눔이라는)
 그 왕국 보상은
우리가
 이 시대 안에서
 우리의 혼-생명을 구하는지
 또는 그것을 잃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1일

마 16:21
그때부터 예수님은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기 시작하시니,

마 16: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나’는
매우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 ‘나’는
본이자 길이다.
더 나아가 이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나’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부활하지 않는다면
어떤 교회도 있을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을 통해
산출되며
존재한다.
우리의
더럽혀진 자아는 물론이고,
심지어 주님의
순결하고 죄 없는 자아까지도
부인되어야 했다.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부인하여
십자가로 가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부활하지 못하셨을 것이고
교회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그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을 부인해야 하며,
그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이 없이
교회가 건축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아 생명을
살찌우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주님,
저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이 형제와
너무 많이 접촉하던 것을
그만두겠습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교회 건축은
전진할 것이다.

교회가 어떻게
실제로 건축될 수 있는가?
그 답은
마태복음 16장
21절부터 26절까지에서
발견된다.
성경적인 용어에 따라
말하자면,
교회를 건축하는 길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교회를 건축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교회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21절은
… 교회를 건축하는 길이
죽음과 부활임을 지적한다.
주 예수님은
산 위에서 변형되셨지만,
이 변형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영구히 변형되셨다.
부활은
변형의 한 형태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변형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셨다.
교회는
… 타고난 생명이나
육체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변형의 영역 안에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타고난 영역이나
육체에 속한 상태에
머무르는 한,
교회에 대해서는
끝난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22절은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고
한쪽으로 가서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며
책망하기 시작하였다.”
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선한 마음으로
주님께,
하나님께서
주님을 긍휼히 여기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 이 절에서
그 강조점은
자기, 곧 ‘자아(self)’에 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은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거라. …’
라고 말씀하셨다.”
라고 말한다.
그다음 24절과 25절에서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혼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혼 생명을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혼 생명을 잃으면
혼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들에 따르면,
주님은
본이시자 길이시다.
누구든지
그분을 따라가기 원한다면,
즉 그분을
본과 길로서
선택하기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자기 곧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은
문들을 말하고
19절은
열쇠들을 말한다.
문들과 열쇠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21절부터 26절까지를
다시 숙고해야 한다.
사탄은
문들을 통해 나타난다.
첫 번째 문은
자아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아가
사탄이 나타나는
음부의 문들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
사탄은 심지어
우리가
선한 마음을 지닐 때에도
자아라는 문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
선하든 악하든,
자아는
사탄이 나타나는
첫 번째 문이다.
자아에 더하여,
21절부터 26절까지는
또한 생각과 혼 생명을 말하는데,
이 둘도 역시
사탄이 나타나도록 하는
문들이다.
따라서 자아와 혼 생명과 생각은
사탄이 나타나도록 하는
주된 문들이다.
많은 때 사탄은
여러분의 생각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이
그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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