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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교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명이 사랑 안에서 씻겨 줌

요한복음은 표적들(2:11)의 책이기 때문에, 발 씻김에 관하여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것은 영적인 의미를 지닌 상징인 표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1-17절).

우리는 발 씻김을 단지 문자적인 의미로만 받을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내재적으로 더 깊고 더 중요하고 영적인 의미로 받아야 한다.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까지에서 생명이신 주님께서 오심으로써, 거듭난 이들로 구성된 교회를 산출하셨다. 거듭난 이들은 그들의 영 안에서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지만, 그들의 몸 안에서는 여전히 육체 안에 살며 땅 위에서 행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주님의 교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월절 전에,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지께로 가셔야 할 자기의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기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왔다가 하나님께로 갈 것을 아시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어 놓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직접 허리에 동여매셨다.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부으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허리에 동여매신 수건으로 닦아 주시기 시작하셨다.” ― 요 13:1, 3-5.

주님께서 벗어 놓으신 겉옷은 그분께서 표현하신 그분의 미덕들과 속성들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존재의 표현을 벗어 버리신 것이다.

주님께서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동여매신 것은 겸손으로 묶이고 제한받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에 유대인들은 샌들을 신었는데, 길에 먼지가 많았기 때문에 발이 쉽게 더러워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잔치에 왔을 때, 상에 앉아 발을 뻗으면 먼지와 냄새가 틀림없이 교통을 방해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쾌한 잔치가 되도록 하려면 발을 씻어야 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고(요 13:1), 이와 같이 그들도 서로 사랑 안에서 행하라고 분부하셨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여러분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합니다.” ― 요 13:14.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 요 13:34.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은 그들과 주님의 교통, 또 거듭난 이들 사이의 교통이 유지되도록, 그들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었다.

우리의 체험에서 발이 더럽혀지는 것은 세상과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고 서로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상징한다. 발 씻김은 영적인 신선함과 활력을 회복하는 것과, 우리와 주님의 교통 그리고 서로 간의 교통을 회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의 체험에서 요한복음 13장의 씻는 물은 성령(딛 3:5), 말씀(엡 5:26, 요 15:3), 생명(요 19:34, 10:10, 고전 15:45하, 고후 3:6, 요일 5:16)을 상징한다. 주님은 성령의 일, 살아 있는 말씀의 빛 비춤, 내적인 생명의 법의 운행으로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신다.

이것은 피로 우리의 죄들을 씻어 내는 것(요일 1:9)이 아니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12장 다음에 이어지는 13장에서 이러한 표적이 언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적인 발 씻김은 주님과의 교통이 진부하게 되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오늘날 세상은 더러워서 우리 성도들은 쉽게 오염된다. 우리가 주님과의 즐거운 교통과 서로 간의 즐거운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또한 우리들 서로가 사랑 안에서 영적인 발 씻겨 줌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연속으로 볼 수 있는 요한일서에 계시된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서 우리가 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씻어짐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고, 그 영과 말씀과 신성한 생명이 충만한 성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문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피가 아니라 그 영과 살아 있는 말씀과 내적인 생명으로 우리를 씻겨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씻겨 줌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단순히 우리 자신을 주님께 열고 내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흐르도록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무언가가 물을 주고 흐르며 우리를 씻겨 줄 것이고, 우리는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은 고양될 것이고, 우리의 온 존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참으로 즐거울 것이다.

“여러분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합니다.” ― 요 13:14.

우리의 체험에서 주 예수님 자신과, 생명이 많은 성도들이 우리를 이렇게 씻겨 줄 수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해 주는 영적인 발 씻김이 우리를 땅에 속한 접촉에서 깨끗하게 지켜 준다. 우리가 땅에서 행하고 일하는 동안,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께서 직접 해 주시는 발 씻김이 필요할 뿐 아니라 형제자매들이 해 주는 발 씻김이 필요하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주려고 할 때마다, 주님의 본을 따라 ‘우리의 겉옷을 벗어 놓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성취들과 미덕들과 속성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낮추고 비워야 한다. 많은 이들이 영성이라는 겉옷을 입고 다른 이들을 내려다본다. 그들은 영적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의 겉옷을 벗어 놓는 것은 우리 자신을 보좌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건을 허리에 동여매는 것은 우리가 묶이고 기꺼이 우리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목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포기한다.

우리 각 사람은 형제자매들에게 영적으로 발을 씻겨 주어 그들을 땅에 속한 접촉에서 깨끗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그들을 계속해서 새롭고 신선하며 살아 있게 해 준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표시이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더럽혀진 발은 우리와 주님의 교통이 진부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깨끗한 발은 주님과의 신선한 교통을 의미한다.

오 년 전이나 십 년 전만큼 오늘도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일 년 전에 가졌던 것과 동일한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발은 더럽혀졌고 그들은 지쳤다. 이것은 영적으로 지친 것으로서 영적인 신선함과 활력을 잃은 것이다.

주님은 늘 신선하시며, 우리가 영적으로 무기력하지 않고 항상 신선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우리 혼을 소생시키시는 이유이다. 발 씻김은 우리와 주님 사이의 친밀한 교통을 유지시켜 주고, 우리의 영적인 활력과 영적인 신선함을 되살아나게 한다.

우리는 결코 자신이 낡아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낡아지는 것은 고정되고 안주하며 점유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계속해서 비워지고 열려 있고 신선하고 새롭고 살아 있고 젊도록 우리 자신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실재의 영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시편 110편 3절의 실재 안으로 안내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 “주님의 전쟁의 날에 / 주님의 백성이 헌신의 광채 안에서 / 기꺼이 자신을 바치리니 / 주님의 청년들은 주님께 / 새벽의 태에서 나온 이슬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반드시 매우 비밀스러운 신선함과 능력과 자양분과 공급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강하게 이끌릴 것이다.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대화한 결과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추구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게 되고 그들의 영적인 에너지가 되살아날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새롭게 함이 필요하며, 그럴 때 우리는 늘 신선하고 활기찰 수 있다.

발 씻김의 의미는 우리의 이전 느낌들을 회복해 주고, 생명의 신선함과 새로움을 갖도록 우리를 다시 이끌어 주며(롬 6:4), 우리에게 신선한 힘을 주는 것이다(시 27:1, 4).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 모든 일에서 주님께 첫째 위치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첫째가는 사랑이신 주님을 참으로 귀하게 여겼던 것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이기는 생명으로 누리고 그 영의 도움을 얻어 그러한 생명을 살아 내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줄 수 없다.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은 우리의 보혜사로서 우리의 사건, 우리의 소송, 우리의 일들을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 각 사람의 발은 씻어져야 하며, 또한 우리는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모든 봉사 가운데 발 씻김보다 더 중요하거나 더 귀한 것은 없다 ―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요 13:17)

발 씻김은 우리의 지극히 큰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문제이다. 우리 각 사람은 형제자매들에게 영적인 발 씻김을 행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여러분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하다고 하자. 여러분은 입으로 어떤 찬양도 할 수 없다. 그런 상태로 저녁 집회에 왔는데,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한다고 하자. 여러분이 기도를 반쯤 했을 때, 여러분은 자신의 기도가 문장을 만들고 있는 것같이 부자연스러워서 기도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이때 집회 가운데 영이 아주 신선한 한 형제의 기도가 여러분의 영을 신선하게 할 것이다. 여러분의 영적인 기운이 새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다. 많은 때 우리는 집회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의 영이 약하여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이렇게 기도하고 저렇게 성경을 읽지만 분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이의 발이 더럽고 씻겨 줄 물이 한 대야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무언가가 우리의 영을 꺼 버리는 것 같다. 이때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어 그가 일어나서 짧게 기도를 하거나 몇 마디 말을 한다면, 즉시 집회가 신선하게 바뀐다. 한 대야의 물이 없고 발 씻겨 주는 일이 없으면, 모든 이의 영은 상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예기치 않게 여러분의 집에 잠시 들러 이야기를 나누거나 간증을 할 때, 가족 모두가 하나님 앞으로 이끌리게 된다. 본래는 하나님과 간격이 있다고 느꼈지만, 이러한 형제나 자매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면 모든 간격이 다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려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즉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반드시 수시로 주님과 교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생활 가운데서 반드시 성령 안에 살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생수를 가질 수 있다. 집회에 올 때마다 여러분에게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생수가 있어야 한다.”

영적인 발 씻김이 없다면, 교회생활은 실현될 수 없고 교회생활의 실재는 사라질 것이다.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주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주님과 지속적으로 교통하며, 연합된 영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한 면으로는 주님 자신께서 해 주시고 다른 한 면으로는 모든 성도가 해 주는 발 씻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교회생활을 갖게 하는 탁월한 교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와 있는 것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만나지 못해서 생긴 부족한 점을 그들이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의 영과 여러분의 영을 상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십시오.”

우리 모두가 날마다 신선한 영적인 체험을 가지기를 바란다. 로마서 15장 32절은 “여러분과 함께 쉬고 새 힘을 얻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발 씻겨 줌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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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엡 5:18 술 취하지 마십시오. 술 취하는 것은 사람을 방탕하게 합니다. 다만 영 안에서 충만해지십시오.

롬 15:32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여러분에게 나아가, 여러분과 함께 쉬고 새 힘을 얻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여러분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하다고 하자. 여러분은 입으로 어떤 찬양도 할 수 없다. 그런 상태로 저녁 집회에 왔는데,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한다고 하자. 여러분이 기도를 반쯤 했을 때, 여러분은 자신의 기도가 문장을 만들고 있는 것같이 부자연스러워서 기도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이때 집회 가운데 영이 아주 신선한 한 형제의 기도가 여러분의 영을 신선하게 할 것이다. 여러분의 영적인 기운이 새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다. 많은 때 우리는 집회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의 영이 약하여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이렇게 기도하고 저렇게 성경을 읽지만 분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이의 발이 더럽고 씻겨 줄 물이 한 대야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무언가가 우리의 영을 꺼 버리는 것 같다. 이때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어 그가 일어나서 짧게 기도를 하거나 몇 마디 말을 한다면, 즉시 집회가 신선하게 바뀐다. 우리의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예기치 않게 여러분의 집에 잠시 들러 이야기를 나누거나 간증을 할 때, 가족 모두가 하나님 앞으로 이끌리게 된다. 본래는 하나님과 간격이 있다고 느꼈지만, 이러한 형제나 자매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면 모든 간격이 다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려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즉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반드시 수시로 주님과 교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생활 가운데서 반드시 성령 안에 살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생수를 가질 수 있다. 집회에 올 때마다 여러분에게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생수가 있어야 한다. 결코 물 없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도리어 다른 사람의 발을 훨씬 더 더럽힐 것이다.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줄 수 없는 사람도 여전히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통할 수 있지만, 그의 영은 분명히 늘 냉담할 것이다. 주님은 오늘날 누군가의 발을 직접 씻겨 주지 않으신다. 그 대신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겨 주게 하신다. 우리 모두는 잘 배워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땅에 속한 접촉에서 깨끗하게 해 주고 우리의 영적인 교통을 좋은 상태로 유지해 주는 영적인 발 씻김이 필요하다. 그럴 때 교회생활이 실현될 수 있다. 교회생활이 신선하고 새로우며 유쾌하고 살아 있게 유지되려면,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이러한 발 씻김이 필요하다. 각 교회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새로움과 신선함 안에 보존될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 가셨다. 이제는 신성한 영과 우리 사람의 영의 참된 연합이 있다. 인성이 신성과 연합되고, 신성이 인성과 연합되었다. 이것이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 안에서는 하늘에 속해 있고 영원하며 영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물질적인 몸 안에서는 여전히 이 땅 위에 있으며 옛 창조물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몸의 교통과 주님과의 교통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땅에 속한 모든 접촉에서 깨끗하게 될 필요가 있다. 이런 교통은 발 씻김에 의해 유지된다. 발 씻김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교통, 서로 간의 교통은 발 씻김 없이 결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없다면, 교회생활은 실현될 수 없다. 사실상 교회생활의 실재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한 면으로는 주님 자신께서 해 주시고 다른 한 면으로는 모든 성도가 해 주는 발 씻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교회생활을 갖게 하는 탁월한 교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5일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가고 있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행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특별히 동역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은 우리의 임재가 죄인들과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 안에 의(義)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만들어 내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반드시 매우 비밀스러운 신선함과 능력과 자양분과 공급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강하게 이끌릴 것이다.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대화한 결과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추구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게 될 것이다. 설령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복음을 전할지라도 사람들 안에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면, 그것 역시 여러분의 실패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버 자매님을 알고 있고, 그녀가 매우 특별했음을 증언할 수 있다. 여러분이 그녀에게 가서 잠시 그녀 앞에 앉아 있게 되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여러분은 그녀에게는 있는데 여러분에게는 없는 어떤 것을 느끼게 되며, 그녀에게 있는 것을 얻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십오 년 전(1921년)에 주님을 갓 믿었을 때 대단히 교만했다. 나는 하루에 성경 한두 장을 읽고서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외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적지만 내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많다). 나는 내가 이해한 것을 그녀에게 들려주려고 그녀를 찾아갔다. 내가 그녀와 함께 몇 마디 기도를 한 후, 그녀가 나를 책망하기도 전에 나는 자신의 교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 없음을 알았다. 이것이 발 씻김이다. 나는 그녀의 임재에 의해 발이 씻어졌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 전에 나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낡고 어두웠지만, 그녀 앞에 가자마자 신선함을 얻고 빛을 얻게 된 것이다. 어떤 때 여러분은 한 형제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씻어졌음을 느낀다. 자신의 영적인 에너지가 되살아남을 느끼고, 다시 한번 하나님을 만지고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다.

며칠 전 나는 발이 더러워졌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여 죄를 처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아주 멀리 계셨고, 결국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느꼈다. 후에 나는 한 자매를 보러 갔는데, 그녀는 아마 구원받은 지 이삼 개월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구원받은 과정을 말해 주었고, 가족들이 그녀를 박해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녀는 나에게서 도움을 얻기 바랐다. 이 말을 들은 후에 나는 그녀에게, 내가 왔을 때는 내 발이 더러웠는데 이제는 깨끗하게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녀의 간증이 나의 낡은 체험을 씻어 내 주었다고 말했다. 디도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3:5)을 말하는데, 이것은 대단히 귀중한 말씀이다.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신선하고 생생하도록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기는 생활을 하지 않고 성령의 도움으로 그러한 생활을 살아 내고 있지 않다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없다. 언제나 신선해야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다.

주님은 “여러분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합니다.”(요 13:14)라고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영적인 신선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사람은 모두 발이 씻어져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의 발은 씻어져야 하며, 또한 우리는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은 “주이며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여러분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모든 봉사 가운데 발 씻김보다 더 중요하거나 더 귀한 것은 없다.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17절) 나는 위(兪) 형제가 늘 말하는 “오늘의 성경이 어제의 성경보다 더 보배롭습니다.”라는 한마디를 귀하게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날마다 신선한 영적 체험을 갖기를 바란다. 로마서 15장 32절의 〈다비역 성경〉은 바울이 “새로워지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발 씻겨 줌의 결과이다.

4일

시 23:2-3 그분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네. 내 혼을 소생시키시며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들로 안내하시네.

행 3:20 그러면 새롭게 되는 때가 주님의 임재로부터 올 것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미리 임명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님을 보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취들이라는 겉옷을 벗어 놓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수건을 우리의 허리에 동여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묶이고 기꺼이 우리의 자유를 잃어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주님은 발을 물로 씻겨 주셨고, 허리에 동여매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기꺼이 다른 이들을 위해서 묶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다른 이들에게 공급하고 그들의 발을 닦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자유로울수록 우리는 더욱더 다른 이들을 손상할 것이다. 단순히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무언가를 공급할 목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포기한다.

우리 각 사람은 형제자매들에게 영적으로 발을 씻겨 줌으로써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때때로 내가 여러분을 방문할 때, 여러분은 나를 향한 사랑을 보여 줌으로써 어느 정도 나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다. 그리고 나도 여러분을 향한 동일한 사랑을 보여 줌으로써, 어느 정도 여러분의 발을 씻겨 주어 여러분을 땅에 속한 접촉에서 깨끗하게 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사이의 교통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사랑으로 이렇게 발을 씻겨 줄 때에만 서로 간에 교통이 유지될 수 있다. 이십오여 년 전에 나는 워치만 니 형제님과 인도하는 동역자들과 함께 일할 때, 그들에게서 이러한 발 씻김을 받아 많은 도움을 얻었다. 그들을 접촉할 때마다 나는 땅에 속한 접촉에서 나를 깨끗하게 지켜 주는 일종의 발 씻김을 느끼곤 했다. 그들은 나를 사랑했고, 땅에 속한 접촉에서 깨끗하게 되도록 영적으로 나의 발을 씻겨 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더럽혀진 발은 우리와 주님의 교통이 진부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깨끗한 발은 주님과의 신선한 교통을 의미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 년이나 십 년 전만큼 오늘도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일 년 전에 가졌던 것과 동일한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발은 더럽혀졌고 그들은 지쳤다. 이것은 영적으로 지친 것으로서 영적인 신선함과 활력을 잃은 것이다. 발 씻김은 여러분의 이전의 느낌을 회복하고, 여러분을 생명의 신선함 안으로 이끌어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능력을 갖게 하며, 이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늘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많은 믿는 이들이 영적 성장에서 정체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찬송과 찬양과 기도조차도 마지못해서 한다. 이러한 상황은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일 수 있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그들이 영적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것은 발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계속 신선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이끄시는 이유이다(시 23:2). 주님은 우리가 날마다 신선하기를 원하신다. 어제는 누렜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다시 푸를 수 있다. 오전에는 누렜을지 모르지만, 오후에는 푸를 수 있다. 주님은 신선한 생수이시다. 그분은 오 분간 흐르다가 멈추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월 매년 계속 흐르신다. 그분은 일 분도 멈추지 않으신다. 그분은 항상 신선하시며, 우리를 계속 신선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활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 기쁨, 평안, 거룩함이다. 오직 이럴 때에만 주님의 생명을 살아 낼 수 있다. 여리고성을 이긴 후에 아이성도 이겨야 한다. 큰 승리가 있은 후에 날마다 작은 승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매일 가져야 할 체험이다.

3일

요 13:14-15 …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여러분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 것같이 여러분도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요 13:34-35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이것으로써 여러분이 내 제자인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무르라.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피가 아니라 그 영과 살아 있는 말씀과 내적인 생명으로 우리를 씻겨 주실 것이다. 때로는 단지 몇 분이면 더러움이 씻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반나절이 걸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씻겨 줌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단순히 우리 자신을 주님께 열고 내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흐르도록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무언가가 물을 주고 흐르며 우리를 씻겨 줄 것이고, 우리는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은 고양될 것이고, 우리의 온 존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참으로 즐거울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직접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서로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도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발을 씻겨 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일을 공급함으로, 말씀의 빛 비춤을 공급함으로, 내적인 생명의 운행을 공급함으로 서로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성령의 일과 말씀의 빛과 내적인 생명의 운행 안에서 씻어지도록 나는 여러분을, 여러분은 나를 돕고 우리는 서로를 돕는다. 우리 형제들은 교통하고 기도하기 위해 함께 모일 때마다, 영적으로 서로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놓으셨다. 비유에서 겉옷은 주님께서 표현하신 그분의 미덕들과 속성들을 상징하며, 겉옷을 벗으신 것은 자신의 존재의 표현을 벗어 버리신 것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주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성취들과 미덕들과 속성들을 벗어 버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이고, 진정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줄 수 있을 정도까지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매우 영적이지만 또한 교만하다. 그들은 함께 모일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낮게 보고, 다른 이들은 결코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본 적이 없거나 영적인 것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성도들과 함께 모일 때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겉옷을 벗어 버리고 우리가 획득한 것을 잊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런 태도로 인하여 죄를 지었다. 이렇게 교만한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결코 남을 도울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영성의 모든 지위를 벗어 놓고, 단순하고 일반적이 되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속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나는 오직 내 허리에 동여맬 수건 하나, 곧 한 조각의 천만 갖고 있을 뿐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제복을 입은 경찰관의 태도로 위협하듯이 온다. 어떤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옷을 입고 오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더 깊은 생명이라는 제복을 입고 온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소위 은사들이라는 제복을 걸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제복을 벗어 놓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우리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 누군가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느낌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항상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을 더 높게 여기면서 그 사람을 우리보다 더 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빚졌고, 우리에게 그 사람에 대한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놓고, 자신의 수준을 낮추며, 자신의 보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겉옷을 벗어 놓는 것은 우리 자신을 보좌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를 심판하는 보좌에 앉아 있으면서, 형제에게 “형제님은 내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라고 말하지 말라.

2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 그분의 긍휼에 따라 새로 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요 15:3 내가 여러분에게 일러 준 말로 여러분은 이미 깨끗해졌으니,

요한복음은 표적들의 책이기 때문에, 발 씻김에 관하여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것은 영적인 의미를 지닌 하나의 표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우리는 발 씻김을 단지 문자적인 의미로만 받을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내재적으로 더 깊고 더 중요하고 영적인 의미로 받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의 표적이기 때문에, 발 씻김의 의의는 주님과 교통하고 서로 교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날마다 땅을 접촉한다. 발 씻김은 우리가 이 땅 위에 있는 동안 생명 주시는 영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님께서 땅에 속한 접촉으로 인한 모든 종류의 더러움에서 우리의 행함을 항상 깨끗하게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하나의 본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교통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주님과 서로를 누릴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러한 발 씻김이 필요하다. 오늘날 세상은 더러워서 우리 성도들은 쉽게 오염된다. 우리가 주님과의 즐거운 교통과 서로 간의 즐거운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또한 우리들 서로가 사랑 안에서 영적인 발 씻겨 줌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많은 때 우리는 죄가 없지만 더럽다. 먼지는 어느 곳에나 있다. 더러워지기가 얼마나 쉬운가. 심지어 우리는 차를 몰고 길을 따라서 집회에 가는 도중에도, 우연히 눈으로 우리를 더럽히는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차를 타기 전에 우리의 영은 살아 있었고 높이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집회소로 가는 도중에 다만 어떤 것들을 봄으로써 우리는 더러워지고 우리의 영은 가라앉는다. 때로는 심지어 교통하는 중에도 더러워질 수 있다.

죄 있는 것들 때문에 우리에게는 피의 씻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죄는 없지만 더러운 것들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적인 씻음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성령과 살아 있는 말씀과 내적인 생명의 씻음이 필요하다.

많은 일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한다. 이 일들은 꼭 죄는 아니지만 세상과 관계있으며 이 세상을 접촉함으로 생겨난다.

여러분은 아침에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하늘이 아주 가깝다고 느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업을 하는 사람이어서, 나가서 매우 합법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으며 조금도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나고 여섯 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될 때, 여러분은 여전히 하늘이 아침에 느꼈던 것처럼 그렇게 가깝다고 느끼는가?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주부는 집안일을 한다. 여러분이 이러한 많은 일들로 바쁘게 되면 하늘이 여러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때 여러분에게 기도할 시간이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할 말이 없다. 여러분은 성경 말씀의 피상적인 글자만 만질 수 있을 뿐 안의 실재는 만지지 못한다. 기도 집회 때 여러분은 기도하려고 하지만 속에는 기도할 말이 없다. 간신히 기도할 어떤 말이 생각날지라도 양심이 여러분을 괴롭힌다. 여러분은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고 여러분의 말과 목소리가 이전과 같지만, 그 의미와 맛은 이전과 같지 않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킨다고 느끼지만,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는 찾아내지 못한다. 만일 여러분이 죄를 지어 하나님에게서 끊어졌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적용해서 그 죄를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여러분은 단지 속이 어두컴컴하고 원래 있던 청명함을 잃었다고 느낄 뿐이다. 이 문제는 일반적인 죄들과는 다르다. 이것을 처리하는 방법은 바로 발을 씻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을 씻는 것은 무엇인가? 발을 씻는 것은 죄짓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항상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을 만질 수 없을 때,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발도 씻겨 주셨다.

신언노트, 2022 11 27

교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명이
사랑 안에서 씻겨 줌
사랑 안에 있는
생명의 씻음으로
교통을 유지함

요한복음 13장 1절은
주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기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라고 말한다.
이 사랑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러므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사랑의 문제,
즉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발을 씻겨 주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발 씻김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심으로써
이 문제를 돌보셔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려고 하셨을 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놓으셨다.
여기서 겉옷은
비유로서
그분께서 표현하신
그분의 미덕들과 속성들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의 존재의
표현을 벗어 버리신 것이다.

주님께서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여기서 물은
성령,
말씀,
생명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성령의 일,
말씀의 빛 비춤,
내적인 생명의 법의 운행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씻겨 주신다.
성경에서
이 세 항목은 각각
물로 상징된다.

주님께서
육체 되심을 통하여
오셔서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이끌어 오셨고,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가셔서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이끌어 가셨다.
우리의 영에 관하여 말하자면,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가져왔고,
주님의 가심은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우리의 물질적인 몸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는
하늘에 속하고
영적이며
영원한 것과
연결되었지만,
우리의 몸 안에서는 여전히
이 땅 위에 있다.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이끄셨고,
영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영 안에서는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몸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 땅 위에 있다.
우리의 거듭난 영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옛 창조물이 아니고
새 창조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옛 창조물 안에,
그리고 이 땅 위에 있다.

비록 우리가
신성한 생명을 가졌고
교회가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타락한 이 육체 안에서
이 땅 위에 살고 있다.
땅에 속한 접촉을 통해
우리는 자주
더러워진다.
고대 유대에서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대개
걸어 다녔다.
즉, 그들의 발로
땅을 접촉했다.
따라서 발 씻음은
그들에게 꼭 필요했다.
영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죄가 있는 것과
더러워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전혀 죄가 없을지라도
매우 더러울 수 있다.
아마 그릇된 것이 전혀 없을지라도
땅에 속한 접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러울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땅을 접촉하는데,
이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그 결과 많은 때
우리는 깨끗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발 씻음이 필요하다.

특히 유대인들은
잔치에 왔을 때
발을 씻는다.
잔치는
교통의 중심이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샌들을 신었는데,
길에 먼지가 많았기 때문에
발이 쉽게 더러워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더러운 상태로
잔치에 왔을 때,
상에 앉아
발을 뻗으면
먼지와 냄새가 틀림없이
교통을 방해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쾌한 잔치를 위해서는
발을 씻어야 했다.
서로 교통하는 곳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교통하기 전에
발을 씻어야만 했다.
씻지 않는다면
교통이 방해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잔치하고
상에서 교통하기 전에
씻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즐거운 교통을
전혀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표적들의 책이기 때문에,
발 씻김에 관하여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것은
영적인 의미를 지닌 상징인
표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우리는
발 씻김을 단지
문자적인 의미로만
받을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내재적으로
더 깊고
더 중요하며
영적인 의미로
받아야 한다.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까지에서
생명이신
주님께서 오심으로써,
거듭난 이들로 구성된
교회를 산출하셨다.
거듭난 이들은
그들의 영 안에서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지만,
그들의 몸 안에서는 여전히
육체 안에 살며
땅 위에서 행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주님의 교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고,
이와 같이 그들도
서로 사랑 안에서 행하라고
분부하셨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은
그들과 주님의 교통,
또 거듭난 이들 사이의 교통이
유지되도록,
그들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었다.

우리의 체험에서
발이 더럽혀지는 것은
세상과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고
서로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상징한다.
발 씻김은
영적인 신선함과 활력을
회복하는 것과,
우리와 주님의 교통
그리고 서로 간의 교통을
회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피로
우리의 죄들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12장 다음에 이어지는
13장에서
이러한 표적이 언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적인 발 씻김은
주님과의 교통이
진부하게 되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오늘날 세상은 더러워서
우리 성도들은
쉽게 오염된다.
우리가 주님과의
즐거운 교통과
서로 간의
즐거운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또한 우리들 서로가
사랑 안에서
영적인 발 씻겨 줌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연속으로 볼 수 있는
요한일서에 계시된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서
우리가 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요한복음은
표적들의 책이기 때문에,
발 씻김에 관하여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것은
영적인 의미를 지닌
하나의 표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우리는
발 씻김을 단지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하나의 표적이기 때문에,
발 씻김의 의의는
주님과 교통하고
서로 교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날마다
땅을 접촉한다.
발 씻김은
우리가
이 땅 위에 있는 동안
생명 주시는 영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님께서
땅에 속한 접촉으로 인한
모든 종류의 더러움에서
우리의 행함을 항상
깨끗하게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하나의 본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교통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주님과 서로를
누릴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러한 발 씻김이 필요하다.
오늘날
세상은 더러워서
우리 성도들은
쉽게 오염된다.
우리가
주님과의 즐거운 교통과
서로 간의 즐거운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또한 우리들 서로가
사랑 안에서
영적인 발 씻겨 줌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많은 때 우리는
죄가 없지만 더럽다.
먼지는
어느 곳에나 있다.
더러워지기가
얼마나 쉬운가.
심지어 우리는
차를 몰고
길을 따라서
집회에 가는 도중에도,
우연히 눈으로
우리를 더럽히는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차를 타기 전에
우리의 영은
살아 있었고
높이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집회소로 가는 도중에
다만 어떤 것들을 봄으로써
우리는 더러워지고
우리의 영은 가라앉는다.
때로는 심지어 교통하는 중에도
더러워질 수 있다.

죄 있는 것들 때문에
우리에게는
피의 씻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죄는 없지만
더러운 것들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적인 씻음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성령과
살아 있는 말씀과
내적인 생명의 씻음이
필요하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킨다.
이것들이
죄가 아닐 수 있지만,
세상적인 요소들이 있으며
이는
우리가
그 세상을 접촉함을 통해
생산된다.

여러분이
아침에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하늘이
아주 가깝다고
느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업을 하는 사람이어서,
나가서
매우 합법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으며
조금도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나고
여섯 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될 때,
여러분은 여전히
하늘이
아침에 느꼈던 것처럼
그렇게 가깝다고 느끼는가?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주부는
집안일을 한다.
여러분이
이러한 많은 일들로
바쁘게 되면
하늘이
여러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때
여러분에게
기도할 시간이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할 말이 없다.
여러분은
성경 말씀의
피상적인 글자만
만질 수 있을 뿐
안의 실재는
만지지 못한다.
기도 집회 때
여러분은
기도하려고 하지만
속에는
기도할 말이 없다.
간신히 기도할 어떤 말이
생각날지라도
양심이
여러분을 괴롭힌다.
여러분은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고
여러분의 말과 목소리가
이전과 같지만,
그 의미와 맛은
이전과 같지 않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킨다고
느끼지만,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는
찾아내지 못한다.
만일 여러분이
죄를 지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다면(끊겼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적용해서
그 죄를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여러분은 단지
속이 어두컴컴하고
원래 있던 청명함을 잃었다고
느낄 뿐이다.
이 문제는
일반적인 죄들과는 다르다.
이것을 처리하는 방법은 바로
발을 씻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을 씻는 것은
무엇인가?
발을 씻는 것은
죄 외에
(죄를 제외하고, 죄로부터 떨어져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키는
각각의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항상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주님은
우리의 죄들을
씻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발들도
씻겨 주셨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무르라.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피가 아니라
그 영과
살아 있는 말씀과
내적인 생명으로
우리를 씻겨 주실 것이다.
때로는 단지 몇 분이면
더러움이 씻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반나절이 걸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씻겨 줌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단순히 우리 자신을
주님께 열고
내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흐르도록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무언가가
물을 주고
흐르며
우리를 씻겨 줄 것이고,
우리는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은
고양될 것이고,
우리의 온 존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참으로 즐거울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직접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서로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도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발을 씻겨 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일을 공급함으로,
말씀의 빛 비춤을 공급함으로,
내적인 생명의 운행을 공급함으로
서로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성령의 일과
말씀의 빛과
내적인 생명의 운행 안에서
씻어지도록
나는 여러분을,
여러분은 나를 돕고
우리는 서로를 돕는다.
우리 형제들은
교통하고 기도하기 위해
함께 모일 때마다,
영적으로
서로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놓으셨다.
비유에서 겉옷은
주님께서 표현하신
그분의 미덕들과 속성들을 상징하며,
겉옷을 벗으신 것은
자신의 존재의 표현을 벗어 버리신 것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주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성취들과 미덕들과 속성들을
벗어 버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이고,
진정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줄 수 있을 정도까지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매우 영적이지만
또한 교만하다.
그들은
함께 모일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낮게 보고,
다른 이들은 결코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본 적이 없거나
영적인 것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성도들과 함께 모일 때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겉옷을
벗어 버리고
우리가 획득한 것을
잊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런 태도로 인하여
죄를 지었다.
이렇게 교만한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결코
남을 도울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임의 모든 정도들을
(영성의 모든 지위들을)
제쳐두고,
단순하게 되고
또 일반적이 되어
우리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어떤 것도
특별하지 않다.
나는 오직
나를 묶는
(나를 둘러싸는, 내게 걸치는)
수건 하나,
곧 한 조각의 천만
가지고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제복을 입은 경찰관의 태도로
위협하듯이 온다.
어떤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옷을
입고 오며,
또 어떤 사람들은
더 깊은 생명이라는 제복을
입는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소위 은사들이라는 제복을
입는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제복을
제쳐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에게
그것을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
누군가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느낌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항상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을
더 높게 여기면서
그 사람을
우리보다 더 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빚졌고,
우리에게
그 사람에 대한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겉옷을 제쳐두고(따로 놓고),
우리의 기준을 낮추며,
또 우리의 왕좌에서 내려올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겉옷을 제쳐두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의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형제를 심판하는
그 왕좌에 앉아,
“당신은
내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라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성취들이라는
겉옷을 벗어 놓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수건을
우리의 허리에
동여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묶이고
기꺼이 우리의 자유를 잃어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발을
물로 씻겨 주셨고,
허리에 동여매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기꺼이
다른 이들을 위해서 묶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다른 이들에게 공급하고
그들의 발을 닦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자유로울수록
우리는 더욱더
다른 이들을 손상할 것이다.
단순히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무언가를 공급할 목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포기한다.

우리 각 사람은
형제자매들에게
영적으로 발을 씻겨 줌으로써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때때로 내가
여러분을 방문할 때,
여러분은
나를 향한 사랑을 보여 줌으로써
어느 정도 나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다.
그리고 나도
여러분을 향한 동일한 사랑을 보여 줌으로써,
어느 정도 여러분의 발을
씻겨 주어
여러분을
땅에 속한 접촉에서
깨끗하게 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사이의 교통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사랑으로
이렇게 발을 씻겨 줄 때에만
서로 간에
교통이 유지될 수 있다.
이십오여 년 전에
나는
워치만 니 형제님과
인도하는 동역자들과 함께 일할 때,
그들에게서
이러한 발 씻김을 받아
많은 도움을 얻었다.
그들을 접촉할 때마다
나는
땅에 속한 접촉에서
나를 깨끗하게 지켜 주는
일종의 발 씻김을
느끼곤 했다.
그들은
나를 사랑했고,
땅에 속한 접촉에서
깨끗하게 되도록
영적으로 나의 발을 씻겨 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더럽혀진 발은
우리와 주님의 교통이
진부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깨끗한 발은
주님과의 신선한 교통을
의미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 년이나 십 년 전만큼
오늘도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일 년 전에 가졌던 것과
동일한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발은
더럽혀졌고
그들은
지쳤다.
이것은
영적으로 지친 것으로서
영적인 신선함과 활력을
잃은 것이다.
발 씻김은
여러분의 이전의 느낌을 회복하고,
여러분을
생명의 신선함 안으로 이끌어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능력을 가지게 하며,
이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늘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많은 믿는 이들이
영적 성장에서
정체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찬송과 찬양과 기도조차도
마지못해서 한다.
이러한 상황은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일 수 있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그들이
영적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것은
발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계속 신선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이끄시는
이유이다.
주님은
우리가
날마다 신선하기를
원하신다.
어제는
누랬을 수 있지만,
오늘은
다시 푸를 수 있다.
아침에는
누랬을 수 있지만,
오후에는
푸를 수 있다.
주님께서
신선한 생수이시다.
그분께서는
오 분간 흐르다가
멈추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월 매년
계속 흐르신다.
그분께서는
일 분도 멈추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항상 신선하시며,
우리를
계속 신선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활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 기쁨,
평안, 거룩함이다.
오직 이럴 때에만
주님의 생명을
살아 낼 수 있다.
여리고성을 이긴 후에
아이성도 이겨야 한다.
큰 승리가 있은 후에
날마다
작은 승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매일 가져야 할
체험이다.

우리 각 사람은
형제자매들에게
영적으로 발을 씻겨 주어
그들을
땅에 속한 접촉에서
깨끗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그들을
계속해서
새롭고
신선하며
살아 있게 해 준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표시이다.

그들의 발은
더럽혀졌고
그들은
지쳤다.
이것은
영적으로 지친 것으로서
영적인 신선함과 활력을
잃은 것이다.

주님은
늘 신선하시며,
우리가
영적으로 무기력하지 않고
항상 신선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우리 혼을 소생시키시는
이유이다.
발 씻김은
우리와 주님 사이의
친밀한 교통을 유지시켜 주고,
우리의
영적인 활력과
영적인 신선함을
되살아나게 한다.

우리는 결코
자신이 낡아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낡아지는 것은
고정되고
안주하며
점유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계속해서
비워지고
열려 있고
신선하고
새롭고
살아 있고
젊도록
우리 자신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실재의 영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시편 110편 3절의
실재 안으로
안내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 “주님의 전쟁의 날에
/ 주님의 백성이
헌신의 광채 안에서
/ 기꺼이 자신을 바치리니
/ 주님의 청년들은
주님께
/ 새벽의 태에서 나온
이슬과 같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특별히
동역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은
우리의 임재가
죄인들과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 안에
의(義)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만들어 내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반드시
매우 비밀스러운
신선함과 능력과
자양분과 공급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강하게 이끌릴 것이다.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대화한 결과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추구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설령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복음을 전할지라도
사람들 안에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면,
그것 역시
여러분의 실패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버 자매님을 알고 있고,
그녀가 매우 특별했음을
증언할 수 있다.
여러분이
그녀에게 가서
잠시 그녀 앞에
앉아 있게 되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여러분은
그녀에게는 있는데
여러분에게는 없는
어떤 것을 느끼게 되며,
그녀에게 있는 것을 얻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십오 년 전(1921년)에
주님을 갓 믿었을 때
대단히 교만했다.
나는
하루에 성경 한두 장을 읽고서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외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적지만
내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많다).
나는
내가 이해한 것을
그녀에게 들려주려고
그녀를 찾아갔다.
내가
그녀와 함께
몇 마디 기도를 한 후,
그녀가
나를 책망하기도 전에
나는
자신의 교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 없음을
알았다.
이것이
발 씻김이다.
나는
그녀의 임재에 의해
발이 씻어졌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 전에 나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낡고
어두웠지만,
그녀 앞에 가자마자
신선함을 얻고
빛을 얻게 된 것이다.
어떤 때 여러분은
한 형제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씻어졌음을
느낀다.
자신의 영적인 에너지가
되살아남을 느끼고,
다시 한번 하나님을
만지고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다.

며칠 전 나는
발이 더러워졌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여
죄를 처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아주 멀리 계셨고,
결국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느꼈다.
후에 나는
한 자매를 보러 갔는데,
그녀는
아마 구원받은 지
이삼 개월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구원받은 과정을 말해 주었고,
가족들이 그녀를 박해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녀는
나에게서
도움을 얻기 바랐다.
이 말을 들은 후에
나는
그녀에게,
내가 왔을 때는
내 발이 더러웠는데
이제는 깨끗하게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녀의 간증이
나의 낡은 체험을
씻어 내 주었다고
말했다.
디도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3:5)을
말하는데,
이것은
대단히 귀중한 말씀이다.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신선하고
생생하도록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기는 생활을 하지 않고
성령의 도움으로
그러한 생활을
살아 내고 있지 않다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없다.
언제나 신선해야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다.

주님은
“여러분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합니다.”
(요 13:14)라고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영적인 신선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사람은 모두
발이 씻어져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의 발은
씻어져야 하며,
또한 우리는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은
“주이며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여러분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모든 봉사 가운데
발 씻김보다
더 중요하거나
더 귀한 것은 없다.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17절)
나는
위(兪) 형제가 늘 말하는
“오늘의 성경이
어제의 성경보다 더 보배롭습니다.”
라는 한마디를
귀하게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날마다
신선한 영적 체험을
가지기를 바란다.
로마서 15장 32절의
〈다비역 성경〉은
바울이
“새로워지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발 씻겨 줌의
결과이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이기는 생명으로
누리고
그 영의 도움을 얻어
그러한 생명을
살아 내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줄 수 없다.
우리 안에 계신
그 영께서
우리의 보혜사로서
우리의 사건,
우리의 소송,
우리의 일들을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여러분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하다고 하자.
여러분은
입으로 어떤 찬양도 할 수 없다.
그런 상태로 저녁 집회에 왔는데,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한다고 하자.
여러분이
기도를 반쯤 했을 때,
여러분은 자신의 기도가
문장을 만들고 있는 것같이 부자연스러워서
기도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이때 집회 가운데
영이 아주 신선한
한 형제의 기도가
여러분의 영을 신선하게 할 것이다.
여러분의 영적인 기운이 새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다.
많은 때 우리는
집회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의 영이 약하여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이렇게 기도하고
저렇게 성경을 읽지만
분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이의 발이 더럽고
씻겨 줄 물이
한 대야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무언가가
우리의 영을 꺼 버리는 것 같다.
이때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어
그가 일어나서
짧게 기도를 하거나
몇 마디 말을 한다면,
즉시 집회가 신선하게 바뀐다.
우리의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예기치 않게
여러분의 집에 잠시 들러
이야기를 나누거나
간증을 할 때,
가족 모두가
하나님 앞으로 이끌리게 된다.
본래는 하나님과 간격이 있다고 느꼈지만,
이러한 형제나 자매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면
모든 간격이 다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려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즉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반드시 수시로 주님과 교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생활 가운데서 반드시
성령 안에 살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생수를 가질 수 있다.
집회에 올 때마다 여러분에게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생수가 있어야 한다.
결코 물 없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도리어
다른 사람의 발을
훨씬 더 더럽힐 것이다.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줄 수 없는 사람도 여전히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통할 수 있지만,
그의 영은 분명히
늘 냉담할 것이다.
주님은 오늘날
누군가의 발을
직접 씻겨 주지 않으신다.
그 대신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겨 주게 하신다.
우리 모두는
잘 배워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땅에 속한 접촉에서 깨끗하게 해 주고
우리의 영적인 교통을
좋은 상태로 유지해 주는
영적인 발 씻김이 필요하다.
그럴 때 교회생활이
실현될 수 있다.
교회생활이
신선하고 새로우며
유쾌하고 살아 있게 유지되려면,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이러한 발 씻김이 필요하다.
각 교회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새로움과 신선함 안에
보존될 것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이끄시기 위해 가셨다.
이제는
신성한 영과 우리 사람의 영의
참된 연합이 있다.
인성이 신성과 연합되고,
신성이 인성과 연합되었다.
이것이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 안에서는
하늘에 속해 있고
영원하며
영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물질적인 몸 안에서는 여전히
이 땅 위에 있으며
옛 창조물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몸의 교통과
주님과의 교통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땅에 속한 모든 접촉에서
깨끗하게 될 필요가 있다.
이런 교통은
발 씻김에 의해 유지된다.
발 씻김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교통,
서로 간의 교통은
발 씻김 없이 결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없다면,
교회생활은 실현될 수 없다.
사실상 교회생활의 실재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한 면으로는 주님 자신께서 해 주시고
다른 한 면으로는 모든 성도가 해 주는
발 씻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교회생활을 가지게 하는
탁월한 교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발 씻김은
우리의 지극히 큰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문제이다.
우리 각 사람은
형제자매들에게 영적인 발 씻김을 행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영적인 발 씻김이 없다면,
교회생활은 실현될 수 없고
교회생활의 실재는 사라질 것이다.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주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주님과 지속적으로 교통하며,
연합된 영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신선한 영적인 체험을 가지기를
바란다.
로마서 15장 32절은
“여러분과 함께 쉬고
새 힘을 얻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다.
이것이
발 씻겨 줌의 결과이다.

1일

요 13:3-5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왔다가 하나님께로 갈 것을 아시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어 놓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직접 허리에 동여매셨다.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부으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허리에 동여매신 수건으로 닦아 주시기 시작하셨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주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기를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말한다. 이 사랑으로 인하여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러므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사랑의 문제, 즉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발을 씻겨 주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발 씻김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심으로써 이 문제를 돌보셔야 한다.

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려고 하셨을 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놓으셨다(요 13:4). 여기서 겉옷은 비유로서 그분께서 표현하신 그분의 미덕들과 속성들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존재의 표현을 벗어 버리신 것이다.

주님은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요 13:5). 여기서 물은 성령(딛 3:5), 말씀(엡 5:26, 요 15:3), 생명(요 19:34)을 상징한다. 주님은 성령의 일, 말씀의 빛 비춤, 내적인 생명의 법의 운행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씻겨 주신다. 성경에서 이 세 항목은 각각 물로 상징된다.

주님은 육체 되심을 통하여 오셔서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이끌어 오셨고,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가셔서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이끌어 가셨다. … 우리의 영에 관하여 말하자면,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가져왔고, 주님의 가심은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우리의 물질적인 몸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는 하늘에 속하고 영적이고 영원한 것과 연결되었지만, 우리의 몸 안에서는 여전히 이 땅 위에 있다.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은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이끄셨고, 영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영 안에서는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몸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 땅 위에 있다. 우리의 거듭난 영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옛 창조물이 아니고 새 창조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옛 창조물 안에, 그리고 이 땅 위에 있다.

비록 우리가 신성한 생명을 가졌고 교회가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타락한 이 육체 안에서 이 땅 위에 살고 있다. 땅에 속한 접촉을 통해 우리는 자주 더러워진다. 고대 유대에서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대개 걸어 다녔다. 즉, 그들의 발로 땅을 접촉했다. 따라서 발 씻음은 그들에게 꼭 필요했다. 영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죄가 있는 것과 더러워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전혀 죄가 없을지라도 매우 더러울 수 있다. 아마 그릇된 것이 전혀 없을지라도 땅에 속한 접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러울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땅을 접촉하는데, 이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그 결과 많은 때 우리는 깨끗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발 씻음이 필요하다.

특히 유대인들은 잔치에 왔을 때 발을 씻는다. 잔치는 교통의 중심이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샌들을 신었는데, 길에 먼지가 많았기 때문에 발이 쉽게 더러워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더러운 상태로 잔치에 왔을 때, 상에 앉아 발을 뻗으면 먼지와 냄새가 틀림없이 교통을 방해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쾌한 잔치를 위해서는 발을 씻어야 했다. 서로 교통하는 곳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교통하기 전에 발을 씻어야만 했다. 씻지 않는다면 교통이 방해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잔치하고 상에서 교통하기 전에 씻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즐거운 교통을 전혀 갖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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