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the Kingdom Life
by Living a Hidden Life
한 숨겨진 생활을 삶에 의하여
그 왕국 생활을 삶
(한 숨은[비밀의] 생명을 생활함으로써
그 왕국 생명을 생활함)
우리는
기도하시러
홀로 산에 올라가심으로
감추어진 생활을 사신
주님의 본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 마 14:23, 눅 6:12.
주님은
무리와 함께
기적의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의)
결과 안에
머물지 않으시고,
그들을 떠나
산에서 기도하시며
홀로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 마 14:14-23.
주님은
아버지께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더 가지시려고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그분을 떠나게 하셨다
― 마 14:22-23.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홀로 기도하실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천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아버지와 하나 되시고,
땅에서
무엇을 하시든지
아버지와 함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은
외딴곳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혼자 아버지를 접촉하시기 위해
모든 사람,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에게서도
떠나시어
산에서 기도하셨다.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산 위에서’,
‘기도 가운데’라는
세 가지 표현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자주 혼자서
기도해야 한다.
다른 이들과 함께
기도할 때,
우리는
홀로 주님께 기도할 때만큼
깊이 주님을 누릴 수 없다.
심지어 주 예수님도
우리에게
우리가 기도할 때
홀로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마 6:6).
성도들을 떠나서
더 높은 수준에 있는
‘높은 산’에 올라가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더 낮은 수준에 있는
땅에 속한 것들을
멀리 떠나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무리와 분별되어
더 높은 수준에 올라가서,
홀로 은밀하게
아버지와 함께하며
그분과
친밀한 교통을 나누어야 한다.
왕국 백성의 원칙은
의로운 행실,
곧 구제하는 것(마 6:2-4)이나
기도하는 것(5-15절)이나
금식하는 것(16-18절)과 같은 행실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지 않고,
감추어진 생활을 하는 것이다.
세 가지 각각의 예시에 관해서
주님은
‘은밀한’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마 6:4, 6, 18).
우리의 아버지는
‘은밀한 가운데’ 계시고
‘은밀한 가운데 보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인
왕국 백성은
아버지의
은밀하고 감추어진 임재 안에 살며
그러한 아버지의 임재를
주의해야 한다.
왕국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서
비워지고 겸손해진 영으로 살며,
순수하고 단일한 마음으로 행하는
왕국 백성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육체 안에서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하늘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영 안에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은밀하게
우리의 의로운 행실을 행한
결과는
육체와 자아가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사회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하락한 기독교계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선한 행실을 과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선한 행실을
행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는
영광받기를 좋아하고
육체는
이목을 끌기를 좋아한다.
성장을 드러내는 성도들은
건강한 방식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은밀한 생명의 성장,
곧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은밀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은밀하게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과 교통해야 한다.
우리는
많이 기도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매일 기도하지만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과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왕국 백성은 반드시
자신의 골방에서 기도하는
어떤 체험을 가짐으로써,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하늘의 아버지를 접촉하고,
아버지에 대한
어떤 은밀한 누림을 체험하며,
아버지에게서
어떤 은밀한 응답을 받아야 한다
― 마 6:6.
언제든지
우리의 의로운 행실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드러내는 것은
생명의 성장을
크게 방해한다.
우리의 인간 생명은
내보이고 전시하기를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언제나 감추어져 있다.
위선자는
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타고난 생명으로는
은밀한 중에
감추어진 생활을 하는 것을
실행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드러내기를 즐기지 않는 생명인
신성한 생명 안에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왕국 백성이 되는 것에
진지하다면,
반드시 우리 아버지의
감추어진 생명에 의해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주는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다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은밀하시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이 사랑은 언제나
감추어진 채로
있을 것이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 사 45:15.
믿는 이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
의로우신 분,
은혜와 자비로 가득하신 분으로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개인 생활 속에서
수많은 일들을 하시면서도,
그분 자신을 감추신다.
하나님은
감추어지기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기를
열망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분명히 함께 계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타난 임재를
보여 주지 않으실 때
엘리야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 왕상 19:9-18.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기를 원했고,
하나님도
엘리야의 원함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으며,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 왕상 19:12.
하나님께서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신약 시대 안으로
안내하고 계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신약 시대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천둥 치듯이
말씀하시지 않고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씀하신다
― 요일 2:27.
엘리야는
자신만이
유일하게 남은
신실한 사람이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을
그분 자신을 위해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심으로
엘리야에게
매우 부드럽게
대답해 주셨다
― 왕상 19:18, 롬 11:2-5.
엘리야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에 따라서만
상황을 판단했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이기는 이들을
그분 자신을 위해
은밀하게 남겨 두셨다.
하나님의 활동은
이처럼 감추어져 있어서
심지어 신언자 엘리야까지도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감추어진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강한 영향력과
위대한 이상과
엄청난 계시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일은
우리 존재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그분 안에 거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우 조용하신 하나님이시며,
너무나 조용하셔서
때로는 아무도
그분의 임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을
더욱더 깨닫게 된다.
우리를 안내하시는
그분의
가장 친밀한 방식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안내하고 계신다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분의 안내를 받아 왔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이러한 조용한 내적 활동에 의해
가장 중요한 안내들을 받는다.
독생자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실
목적으로 오셨을 때,
그분은
인간 생명 안에,
즉 그 용모가 ‘상하였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인간 생명 안에
자신을 감추셨다
― 사 52:14, 53:2.
그분은
보잘것없는 지역인
갈릴리의 작은 동네
나사렛 출신이셨고,
유대인들은
그 동네에 관해서
어떤 신언자나 저명한 사람도
그곳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 요 1:46, 7:52.
따라서 그분께서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신언자이시라는 것을
믿기조차도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나사렛 사람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계셨다
― 골 2:9.
또한 나사렛 사람 예수님은
가난한 집안에 나셨고,
자라서 목수가 되셨다.
그분은
삼십 세가 되기까지
매우 평범한 목수로서
매우 낮은 방식으로 일하셨다.
누가
그분 안에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는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겠는가?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시를 싫어하시는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드러내어 일하시기보다
은밀하게 일하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 마 17:1-9, 요 20:14-17,
눅 24:13-37, 요 20:24-29, 사 39:2-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뵌 적이 없으면서도
사랑합니다.
지금도
그분을 뵙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으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며”.
믿는 이들이
뵌 적도 없는 분을
사랑하는 것은
기이하고 비밀한 일이다
― 벧전 1:8.
주님의 부활 이후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위한
주된 훈련은
그분을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노선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중심과 전부로 하는
하나님의 경륜의 모든 것은
보이는 영역 안에
있지 않고,
믿음에 속한
보이지 않는
분위기와 영역 안에 있다
― 고후 4:13, 16-18, 5:7,
히 11:1, 엡 3:17상, 딤전 1:4하.
우리가
자신의 무능함을
가장 잘 의식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게 임재하신다
― 고후 12:9-10.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며,
그리고 강력하게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책임은
그분의 내적인 음성,
곧 그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에
반응함으로써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다.
그 음성은 너무나
우리 자신의
느낌의 일부인 것처럼 보여서,
우리는 좀처럼
그것을
음성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음성에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은밀하지만
끊임없이,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편 42편 7절은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르며”
라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우리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온 것에만
깊은 속에서 반응할 수 있다.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다른 이들의 깊은 곳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왕국 생활은
깊은 곳에 있는 생활,
곧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활이다
― 사 37:31, 행 6:7, 12:24, 19:20.
한 면에서 우리는
생명의 씨이신 그리스도께서
좋은 땅인 우리 마음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리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하며
(마 13:23),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식물로서
좋은 땅의 실재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골 2:6-7).
좋은 땅은
세상적인 통행으로
굳어지지 않고
감추어진 죄들이 없으며
이 세상의 염려도 없고
재물에 속지 않는
좋은 마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서
이러한 것들을 처리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라심으로
자라게 된다’
― 골 2:19.
우리는
좋은 땅의 실재이신
그리스도 안에
심어졌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특별히 아침에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에)
그분을 흡수해야 한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가에,
어떤 씨는 흙이 얕게 덮인 바위들 위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이것은
사람이 말씀을 받는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 마 13:4-8, 18-23.
주 예수님은
이러한 서로 다른 상태들 중의 하나인
바위들 위에
흙이 얕게 덮여 있는 상태에 대해
말씀하신다.
즉 표면에
흙이 얕게 덮여 있고
그 아래에는
바위들이 있는 것이다.
씨가
이런 종류의 땅에 떨어질 때
그 씨는
곧 싹을 내지만,
해가 돋아 내리쬐자마자
이 싹은
뿌리가 없어
말라 버린다
― 마 13:5-6.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토양 아래에서 일어나는
성장이다.
잎은 무엇인가?
그것은
토양 위에서 일어나는
성장이다.
다시 말하면,
뿌리는 감추어진 생활이며,
반면에 잎은 드러난 생활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문제점은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많이 있지만,
비밀한 생활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추어진 생활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체험이 드러난다면,
이때 우리의 모든 성장은
위를 향한 것이고,
아래를 향한 성장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뿌리 없이
잎만 있는 사람인 것이며,
얕은 흙 위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미덕을 과시하고,
자신의 존재의 깊은 곳에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뿌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시험과 유혹의 때에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심으로
우리가
아래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체험들이 필요하다
― 고후 12:1-4.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갔고
낙원으로 이끌려 갔지만,
십사 년이 지날 때까지
그 체험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바울의 뿌리는
토양 아래
깊이 박혀 있었다.
우리가
바울의 일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뿌리’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외적인 행실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내적인 생명을
가져야 하고,
바울의 드러난 능력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은밀한 체험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간증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체험들이
감추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 고후 4:5.
뿌리가 없는 것은
어떤 감추어진 보물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감추어진 생활이나
감추어진 체험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체험들은
덮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 사 39:2-8.
우리가
주님과 가지고 있는
비밀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셔서
무언가를 드러내실 때에만,
우리는
용기를 내어
그것을 드러낸다.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체험을
어느 형제에게
교통해 주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감히
그것을 억누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법칙,
곧 교통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체들 사이의
생명의 흐름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감추어진 부분,
곧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생활에
깊이가 없다면,
우리의 피상적인 일은
다른 이들의 삶에
피상적인 영향만을 줄 것이다.
오직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른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적인 생활은
하나님과의
내적이고
감추어진
그리고 중단되지 않는
교통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다’
(호 14:5).
이런 종류의 생활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 호 14:5-7.
깊이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주님과
직접적이고 친밀한
교통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가 4장 12절은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라고 말한다.
주님을 사랑하여
추구하는 이는
자신의 영적 진보의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동산이 되었다.
그녀는
열린 동산이 아니라
잠근 동산이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분의
기쁨을 위한 것이며,
다른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믿는 이들이
조금 더 잠그고
더 단단하게 봉한다면,
그들의 일은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우리가
깊이 뿌리를 박고
깊은 곳에서
감추어진 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서
더 깊은 일을 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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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replies on “감추어진 생활을 함으로써 왕국 생활을 함”
신언노트 요약, 2019 05 19
한 숨겨진 생활을 삶에 의하여
그 왕국 생활을 삶
(한 숨은[비밀의] 생명을 생활함으로써
그 왕국 생명을 생활함)
우리는
기도하시기 위하여
은밀하게
(privately;
남몰래, 비공식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분의 그 산으로 올라가심 안에서
한 숨겨진 생활을 사시는
주님의 그 본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무리들과 함께한
(with the crowds;
그 사람들과[군중과] 함께)
그 기적의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오천 명의 남자들을 먹이심의 그 기적[의])
그 결과 안에
머무르지 않으셨고
(did not remain;
남아 있지 않으셨고),
오직(but) 그분께서
은밀하게
그들로부터 떠나가셨으며
(went away from them)
기도 안에서
그 산 위에서(on)
그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께서
그 아버지께
은밀하게 기도하시는
더 많은 시간을
가지실 수 있도록
(in order that He might have)
그 제자들이
그분을 떠나게
강제하셨습니다
(compelled;
강요하셨습니다, 내모셨습니다,
억지로 시키셨습니다).
그분께서
그 하늘들 안에 계셨던(was;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
은밀하게 기도하실
필요가 있으셨는데,
이는(so that; 그 결과)
그 하늘들의 그 왕국을
세우심을 위하여
(for the establishing;
…의 그 확립시키심을[안정시키심을] 위하여)
그분께서
땅 위에서 하셨던
어떤 것 안에서든
(in whatever; 무엇에서나)
그분께서
그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고
(might be one;
하나이시고)
또 그분과 함께하시는(with; 함께)
그 아버지를
가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께서
이것을
그 버림받은 곳에서
(in the deserted place;
그 황폐한 곳에서, 사람이 없는 그 장소 안에서)
하셨던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산 위에서 (하셨고),
그 모든 사람들,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떠나셨으며
(leaving; 두고 가셨으며),
이는(so that; 그 결과)
그분께서
그 아버지를 접촉하시기 위하여
혼자 계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세 구들을
(three phrases; 세 구절들을)
귀중하게 여겨야만 합니다
―‘그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to be with)’,
‘그 산 위에서(on)’,
또 ‘기도 안에서(in)’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with others)
기도하는 것이
좋지만,
자주 우리는
혼자서
(by ourselves;
다만 혼자서, 다른 사람 없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은밀하게 주님께 기도할 때만큼
깊이
주님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주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은밀하게
우리의 문을 닫아야만 하고
또 비밀리에 보시는
(sees in secret;
비밀히[숨어서] 아시는)
그 아버지께
기도해야만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친밀하신지
또 우리가
그분께
얼마나 가까운지에 관한(of; …의)
그 감각을
(the sensation; 그 느낌을)
가집니다.
우리는
그 무리들,
우리의 가족,
우리의 친구들,
또 그 교회 안에 있는 그 성도들을
떠나서(to leave)
한 “높은 산” 위에 있는
더 높은 한 수준까지
(to a higher level;
한 더 높은 높이[단계, 정도]까지)
가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더 낮은 한 수준 위에 있는
땅에 속한 그것들로부터
(from the earthly things;
그 세속적인[세상의, 지구의] 것들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서
더 높이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더 높은 한 수준까지 이르러
(to get; 도착하여, 와서),
그 무리로부터 분리될
(separated; 분별될),
곧 은밀하게 또 비밀하게
그 아버지와 함께 있어서(to be)
그분과
친밀한 교통을 가질(to have)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왕국 백성의
그 원칙은
그들이
한 숨겨진 생활을
사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의로운 행위들을
―기부함(giving; 줌),
기도함,
또 금식함과 같은 행위들을
실행하지 않습니다
(not performing;
수행하지[공연하지, 연기하지] 않습니다):
이 세 실례들의 각각에 관하여,
주님께서
‘비밀(secre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마 6:4, 6, 18);
우리의 아버지께서
‘비밀리에(in secret)’ 계시고
‘비밀리에 보십니다’;
그 왕국 백성은,
하늘의 그 아버지의 아이들로서,
반드시 그 아버지의
비밀과
또 숨겨진 임재 안에
살아야만 하고
또 (그것을)
무척 좋아해야만 합니다
(must … care for;
돌보아야만 합니다).
그 왕국의
하늘에 속한 그 다스림 아래에서
비워진 또 겸허해진
한 영 안에서 살고
또 순수한 또 단일한
한 마음 안에서 행하는(walk; 걷는)
그 왕국 백성은,
사람들의 그 칭찬을 위하여
그 육체 안에서
어떤 것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오직 그들의 하늘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림을 위하여
(for the pleasing of … Father)
그 영 안에서(in the spirit)
모든 것들을 해야만 합니다.
비밀리에
우리의 의로운 행위들을 함의
그 효과는
(The effect; 그 영향은[결과는])
그 육체와 또 그 자아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회 안에 있는
또 심지어 하락한 기독교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선한(good; 좋은) 행위들을
과시하는 것이
(to make a show of;
자랑함이, …의 한 보여 줌을 만듦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아는
영광받는 것을 사랑하고
(loves; 대단히 좋아하고),
또 그 육체는
응시되는 것을
(to be gazed upon;
바라보아짐을)
사랑합니다.
공공연하게
(openly;
드러내 놓고, 터놓고, 숨김없이, 솔직하게)
자라는
그 성도들은
한 건강한 방식으로(in; 안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 안에서의
어떤 비밀한 성장
(some secret growth;
어떤 남모르는[숨은, 은밀한] 성장),
곧 그리스도에 관한(of; 의)
어떤 비밀한 체험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한 비밀한 방식으로(in; 안에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경배하며,
주님을 접촉하고,
또 주님과 교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기도해야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가 기도하는지를
알게 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함이나
또는 그들이
그것에 대하여
알게 함 없이
매일 기도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과
(that … are healthy;
건전하다는[정상적이라는] 것과)
또 우리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왕국 백성은 반드시
그들의 혼자 있을 수 있는 방 안에서의
(in their private room;
그들의 사적인[비공개의, 은밀한, 비밀한]
방 안에서의, 그들의 골방에서의)
기도의 어떤 체험을
가져야만 하고,
비밀리에(in secret)
그들의 하늘의 아버지를
접촉해야만 하며,
그 아버지에 관한(of; …의)
어떤 비밀한 누림을
체험해야만 하고,
그분께로부터
어떤 비밀한 응답을
(answer;
대답을, 해답을, 반응을, 해결책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언제든지(Any time)
우리가
우리의 의로운 행위들 안에서
우리 자신들을 드러내면
(exhibit;
전시하면, 나타낸다면),
우리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한 드러냄은
우리의 생명 안에서의 성장을
크게 좌절시킵니다
(frustrates; 방해합니다).
우리의 사람의 생명은
한 전시
(a display;
한 과시, 한 전람, 한 진열),
곧 한 공개적인 보여 줌을
(a public show;
한 공개된[널리 알려진, 공공연한, 소문난]
뽐냄을[허식을, 허세를, 표현을, 외관을, 티를])
만드는 것을
사랑하지만
(loves; 대단히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항상 숨겨져 있습니다;
한 위선자는
속에
(within; 안에는)
아무것도 가짐 없이
한 겉보기의 나타냄을
(an outward manifestation;
한 외적인[표면상의, 밖으로 향하는, 육체적인]
드러내 보임을[표명을, 명시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서
비밀리에
한 숨겨진 생활을 삶을
(living a hidden life;
한 숨은 생명을 사는 것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 신성한 생명,
곧 한 과시함을
(making a show;
한 자랑함을[보여 줌을 만듦을])
즐기지 않는
그 생명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왕국 백성이 됨에 대하여
(about being …;
… 백성임에 관하여)
진지하다면
(if … are serious;
심각하다면, 진심이라면, 엄숙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아버지의
그 숨겨진 생명에 의하여
(by the hidden life;
그 숨은 생활로)
사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 우주는
하나님께서
숨겨져 계시다는 것,
곧 하나님께서
비밀하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이 사랑은 항상
숨겨져서 남아 있을 것입니다
(will always remain hidden;
언제나 숨겨진 채로
계속 머무를 것입니다).
“참으로
(Surely;
확실히, 틀림없이, 정말)
당신께서는
자신을(Himself) 숨기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 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구원자시여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 45:15):
믿는 이들은
하나님을
그 전능하신 한 분,
그 의로우신 한 분,
은혜와 또 자비가(of) 충만하신
그 한 분으로
알 수 있지만,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hides)
그 한 분으로서,
그분께서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으십니다
(is unknown;
경험되지 않으십니다,
헤아려질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한가운데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또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들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하시지만,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을 감추십니다(conceals):
하나님께서는
감춤을
(concealment;
숨김을, 은폐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전시를
(display;
과시를, 전람을, 진열을)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보기의 나타냄들을
(outward manifestations;
외적인 드러내 보임들을)
갈망하지 않으시지만
(does not crave;
열망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그것들 없이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갈멜산 위에서
엘리야와 함께 계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명백한(manifest; 분명한) 임재를
주지 않으셨을 때
(when … withheld;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 억제하셨을 때),
엘리야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could not bear it;
그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분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는
한 하나님이시기를
(to be a God;
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원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had not realized;
체득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또 강한 그 바람 안에
계시지 않았고,
그분께서
그 지진 안에
계시지 않았으며,
또 그분께서
그 불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한 “부드러운
(gentle;
온화한, 순한, 너그러운,
예의 바른, 평온한, 조용한),
곧 조용한
(quiet;
말이 별로 없는, 차분한, 안정된,
평온한, 온화한, 부드러운)
목소리(voice; 음성)” 안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곧 조용한
한 목소리 안에서
(in a … voice; 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는
그 사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신약 시대 안으로
안내하고 계셨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안에서
(in which; 그 신약 시대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천둥 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not by thundering;
우레와 같은 큰소리로 말씀하시지 않고,
소리 지름[고함침]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직 부드럽게 또 조용하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그가
남아 있었던
유일하게 신실한
그 한 사람이었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바알에게
그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들을
그분 자신을 위하여
(for Himself; 스스로)
따로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심에 의하여
엘리야에게
매우 부드럽게
대답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그가 볼 수 있었던 무엇으로
(with what; 무엇과 함께)
그 상황을 추정했지만
(had reckoned;
생각했지만, 계산했지만, 판단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바알에게
그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이기는 이들을
그분 자신을 위하여
비밀하게
따로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그렇게 숨겨져 있었고
그래서(that)
그 신언자 엘리야조차도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그 숨겨진 본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강력한(mighty) 영향력들,
위대한(great) 이상들,
또 거대한(tremendous) 계시들만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surest) 일은
우리의 존재들의
그 비밀 안에서
(in the secret;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 안에서,
은밀한 곳에서)
행하여집니다
(is done;
일해집니다, 수행됩니다).
더 많이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또 더 많이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수록,
하나님께서
매우 조용하신 한 하나님이시고,
너무 조용하셔서(that)
그분의 임재가
흔히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is often undetected;
자주[종종] 감지[탐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더 많이 깨닫습니다.
그분의
우리를 안내하심의
가장 친밀한 방식이
너무 자연스러워서(that)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안내하고 계신다는 것을
거의 조금도 감지하지 못하지만
(scarcely perceive … at all;
거의 조금도 인지[지각, 파악]하지 못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somehow;
어떻게든지 해서, 그럭저럭, 아무튼)
인도되어 왔습니다
(have been led;
이끌렸습니다, 안내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큰 안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흔히
(often; 자주)
하나님의
이 조용한 내적 활동에 의해서입니다.
그 유일하게 나신 아들께서
(the only begotten Son; 그 독생자께서)
하나님을 표명하심의
(declaring God;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심의[분명히 말하심의,
공표하심의, 나타내심의, …임을 밝히심의])
그 목적을 위하여
오셨을 때,
그분께서
사람의 한 생명 안에
그분을 숨기셨습니다
―그의 모양이
(whose appearance)
“손상되었던
(marred;
훼손되었던, 망쳐졌던,
보기 흉하게 되었던),”
사람의 한 생명,
곧 매혹하는 형태도
(form;
형체도, 모습도)
또는 위엄도
(majesty;
존엄도, 장엄함도, 위풍당당함도)
가지지 않았던
사람의 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갈릴리,
곧 중요하지 않은
(insignificant;
대수롭지 않은, 하찮은, 의미 없는)
한 지방으로부터 오셨고
(came from …; 한 지방 출신이셨고),
또 나사렛이라는 그 도시
(the town; 그 읍),
곧 한 작은 도시로부터 (오셨는데)
그것에 관하여
(of which; 그 작은 도시에 관하여)
어떤 신언자나
또는 명성 있는(of repute; 저명한) 사람도
거기에서부터 오지 않았다고
(거기 출신이 아니라고)
그 유대인들에 의하여
말해졌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나타나셨을 때
(when … appeared;
보이기 시작하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found it hard to believe;
… 생각했습니다[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한 신언자이셨다는 것을
믿는 것조차도 어렵다고
여겼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사렛의(of; … 출신의) 예수님 안에
숨겨지셨습니다.
또한,
나사렛의 예수님께서
한 가난한 집에 속하셨고
또 자라셨으며
한 목수
―매우 평범한 한 목수가
되셨고,
그분께서
삼십 세가 되시기까지,
매우 작은 한 방식으로
(in a very small way;
아주 소규모로[조촐하게, 하찮게,
초라하게, 신분이 낮게, 영향력이 없게])
일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그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사셨다는 것을
(that He was indwelt by …;
그분께서
하나님에 의하여
내주되셨다는 것을)
누가 한 번이라도
생각했을 것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주의 깊게
그 성경을 연구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시를 싫어하시는
(dislikes ostentation;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이 같은
(the kind of; 이 종류의)
성품을
(temperament; 기질을, 체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볼 것입니다
(will see; 알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공공연하게보다(than openly)
비밀하게 일하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분을
(Whom; 예수 그리스도를)
뵙지 못했지만,
여러분이 사랑합니다;
그분 안으로(into whom)
현재는 그분을 뵙지 못하지만,
믿고 있고,
여러분이
말할 수 없는
또 영광으로 가득한
큰 기쁨으로
(with joy; 환희로)
크게 기뻐합니다
(exult;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의기양양합니다, 뛰어오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뵌 적이 없으면서도
사랑합니다.
지금도
그분을 뵙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으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며)”:
그 믿는 이들이
뵙지 못한 그 한 분을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한 놀랄 만한 일이고
(a wonder;
한 경이로운 일[기적]이고)
또 한 신비입니다
(a mystery;
한 비밀[수수께끼]입니다)(벧전 1:8).
주님의 그 부활 이후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그 주된(chief; 주요한) 훈련은
그분을
자신을 숨기시는 한 하나님으로 앎의
그 노선을 따라 왔습니다
(has come along the line;
그 노선과 함께[…에 부합하여, …을 가지고]
왔습니다[생겼습니다]).
그것의
(its;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임과
(centrality; 구심성과, 중심적 역할과)
또 광범위함이신
(as … universality; 보편성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경륜의
각각의 모든 것들은
그 보여지는 영역 안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의
그 보여지지 않는
분위기와
(atmosphere;
기운과, 장소와, 공기와, 대기와)
또 영역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능을 가장 자각할 때
(When … are most concious of impotence;
무력을 최고로[극도로]
의식할[알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게 임재하십니다
(is most powerfully present;
최고로 강하게[유력하게] 계십니다):
자신을 숨기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들 안에서
일하시고
(is at work;
작업하시고, 움직이시고, 효과를 내시고),
또 그분께서
힘차게
(mightily;
기운차게, 격렬하게, 맹렬히, 강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안에서
(within;
내부에서, 마음속에서)
그분의 목소리
―그 “부드러운, 곧 조용한 목소리”에
반응함에 의하여
그분과 협력하는 것인데,
그 음성은 너무 많이
우리 자신의 느낌들의
한 부분인 것처럼 보여서(that)
우리는
거의 조금도
(scarcely … at all)
그것을
한 목소리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의
그 가장 깊은 깊이들 안에
(in the deepest depths;
그 가장 깊은 곳들 안에)
새겨진
(registered;
기록된, 등록된, 적힌,
명기된, 명심하게 새겨진),
그 목소리에,
우리는 반드시
아멘(Amen)이라고
말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서,
비밀하게
또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시는
그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2편 7절은
“깊은 곳이
깊은 곳을 향하여
부릅니다
(Deep calls unto deep;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르며)”
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직 우리 속의 깊은 곳에서부터
유출되는 것에만
깊은 속에서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곳들에서부터 있지 않는
어떤 것도
다른 사람들의 그 깊은 곳들에
결코 도달하지 않습니다.
그 왕국 생활은
그 깊은 곳들 안에 있는
한 생활,
곧 “아래로
뿌리를 내릴 수 있고
(can take root)
위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 생활입니다
(사 37:31).
한편으로,
우리는
생명의 그 씨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좋은 땅인
우리의 마음의
그 토양(soil; 흙)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시도록
허락해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식물들로서(plants),
그 좋은 땅의 그 실재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의
그 토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좋은 땅은
그 좋은 마음을
나타내는데
이는(that)
세상적인 통행에 의하여
딱딱해지지 않고,
숨겨진 죄들이 없으며,
또 그 시대의 그 염려와
또 재물의 그 속임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이것들을 처리하시도록
매일 허락해 드릴
필요가 있고
그 결과(so that)
우리가
하나님의 그 성장과 함께
(with the growth of God;
하나님의 그 자라심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좋은 땅의
그 실재이신
그리스도 안에
심겼기(have been planted; 심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내어
(to take time)
그분을 흡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 아침에
[in the morning; 내일 아침에]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의 시간 안에서[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가에,
어떤 씨는 흙이 얕게 덮인 바위들 위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말씀을 받는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주 예수님은
이 서로 다른 상태들 중의 하나인
바위들 위에
흙이 얕게 덮여 있는 상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표면에
흙이 얕게 덮여 있고
그 아래에는
바위들이 있는 것입니다.
씨가
이런 종류의 땅에 떨어질 때
그 씨는
곧 싹을 내지만,
해가 돋아 내리쬐자마자
이 싹은
뿌리가 없어
말라 버립니다.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토양 아래에서 일어나는
성장입니다.
잎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토양 위에서 일어나는
성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뿌리는 감추어진 생활이며,
반면에 잎은 드러난 생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문제점은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많이 있지만,
비밀한 생활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추어진 생활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체험이 드러난다면,
이때 우리의 모든 성장은
위를 향한 것이고,
아래를 향한 성장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뿌리 없이
잎만 있는 사람인 것이고,
얕은 흙 위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미덕을 과시하고,
자신의 존재의 깊은 곳에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시험과 유혹의 때에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심으로
우리가
아래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갔고
낙원으로 이끌려 갔지만,
십사 년이 지날 때까지
그 체험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뿌리는
토양 아래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일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뿌리’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외적인 행실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내적인 생명을
가져야 하고,
바울의 드러난 능력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은밀한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간증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체험들이
감추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뿌리가 없는 것은
어떤 감추어진 보물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감추어진 생활이나
감추어진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체험들은
덮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가지고 있는
비밀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셔서
무언가를 드러내실 때에만,
우리는
용기를 내어
그것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체험을
어느 형제에게
교통해 주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감히
그것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법칙,
곧 교통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체들 사이의
생명의 흐름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감추어진 부분,
곧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
깊이가 없다면,
우리의 피상적인 일은
다른 이들의 삶에
피상적인 영향만을 줄 것입니다.
오직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릅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적인 생활은
하나님과의
내적이고
감추어진
그리고 중단되지 않는
교통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입니다’
(호 14:5).
이런 종류의 생활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주님과
직접적이고 친밀한
교통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아가 4장 12절은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추구하는 이는
자신의 영적 진보의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열린 동산이 아니라
잠근 동산입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분의
기쁨을 위한 것이고,
다른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믿는 이들이
조금 더 잠그고
더 단단하게 봉한다면,
그들의 일은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뿌리를 박고
깊은 곳에서
감추어진 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서
더 깊은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6일
시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마 13:5
또 어떤 씨들은
흙이 얕게 덮인
바위 위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아니하여
곧 싹이 나왔지만,
깊은 곳에서 나온
부름만이
깊은 곳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얕은 것은
결코 깊은 것을 만질 수 없고,
표면적인 것은
결코 내적인 것을 만질 수 없다.
… 다른 이들은
우리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온 것에만
깊은 속에서
반응할 수 있다.
…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다른 이들의 깊은 곳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깊은 곳에서
유익과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의 깊은 속에서
어떤 것도 나올 수 없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 어떤 씨들은
… 흙이 얕게 덮인
바위 위에 떨어졌다
(마 13:5).
씨가
이런 종류의 땅에 떨어질 때
그 씨는
곧 싹을 내지만,
해가 돋아 내리쬐자마자
이 싹은
뿌리가 없어
말라 버린다.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토양 아래에서
일어나는 성장이다.
잎은 무엇인가?
그것은
토양 위에서
일어나는 성장이다.
다시 말하면,
뿌리는
감추어진 생활이며,
반면에 잎은
드러난 생활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문제점은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많이 있지만,
비밀한 생활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추어진 생활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 우리의 모든 체험이
드러난다면,
이때 우리의 모든 성장은
위를 향한 것이고,
아래를 향한 성장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뿌리 없이
잎만 있는 사람인 것이며,
얕은 흙 위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미덕을 과시하고,
자신의 존재의 깊은 곳에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뿌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시험과 유혹의 때에
견디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알려진 부분을 제하고 나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체험은
얼마나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심으로
우리가
아래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바울은
그의 모든 계시를
드러냈는가?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는데,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갔습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고후 12:2)
라고 말했다.
그는
십사 년이 지날 때까지
이 체험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 하나님의 교회는
바울의 이러한 체험을
알지 못했고,
… 어떤 사도도
그것에 대해
듣지 못했다.
바울의 뿌리는
토양 아래
깊이 박혀 있었다.
우리가
바울의 일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뿌리’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외적인 행실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내적인 생명을
가져야 하고,
바울의 드러난 능력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은밀한 체험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있는
영적인 것들과
특별한 체험이
보존되지 않는 데 있다.
조그마한 체험만 있어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우리가
간증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영적인 체험들이
감추어질 필요가 있고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 뿌리가 없는 것은
어떤 감추어진 보물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감추어진 생활이나
감추어진 체험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체험들은
덮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가지고 있는 비밀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지켜야 한다.
…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셔서
무언가를 드러내실 때에만,
우리는
용기를 내어
그것을 드러낸다.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체험을
어느 형제에게
교통해 주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감히
그것을 억누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법칙,
곧 교통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법칙을 억누르면,
흐름은
멈추어 버린다.
우리는
소극적이어서는 안 되고
적극적으로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
또 지체들 사이의
생명의 흐름이 무엇인지
배울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나는 또한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감추어진 부분,
곧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체험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배울 것임을
믿는다.
우리의 생활에
깊이가 없다면,
우리의 피상적인 일은
다른 이들의 삶에
피상적인 영향만을 줄 것이다.
오직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른다’.
5일
벧전 1: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뵌 적이 없으면서도
사랑합니다.
지금도
그분을 뵙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으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며,
골 3:3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가지고, 그리스도로]
(with Christ in God;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감추어진 본성을 깨닫기를
간절히 원한다.
우리는
강한 영향력과
위대한 이상과
엄청난 계시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일은
우리 존재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일은 자주
세미한 속삭임이나
작은 영향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나 세미하여
우리 자신의 느낌과
구별할 수조차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다.
때때로 우리 깊은 속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무언가
어렴풋이 제안하는 것이
(이것을 느낌, 음성, 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있다.
‘이것은
너의 타고난 생명이다.
이것은
십자가로 가야 한다.’
이러한 말은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정의조차 할 수 없는
이러한 말이
가장 적극적인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임을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단언하건대,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말씀과 일이다.
이러한 신성한 활동이
이천 년의 교회 역사 동안
교회를 지켜 왔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그분 안에 거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우 조용하신 하나님이시며,
너무나 조용하셔서
때로는 아무도
그분의 임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을
더욱더 깨닫게 된다.
우리를 안내하시는
그분의 가장 친밀한 방식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안내하고 계신다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분의 안내를 받아 왔고
어떤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이러한 조용한 내적 활동에 의해
가장 중요한 안내들을 받는다.
독생자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실
목적으로 오셨을 때,
그분은
인간 생명 안에,
즉 그 용모가 ‘상하였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인간 생명 안에
자신을 감추셨다
(사 52:14, 53:2).
그분은
보잘것없는 지역인
갈릴리의 작은 동네
나사렛 출신이셨고,
유대인들은
그 동네에 관해서
어떤 신언자나 저명한 사람도
그곳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요 1:46, 7:52).
따라서 그분께서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기가 어렵다고
여겼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신언자이시라는 것을
믿기조차도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나사렛 사람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계셨다.
이분은
가난한 집안에 나셨고,
자라서 목수가 되셨다.
그분은
삼십 세가 되시기까지
매우 평범한 목수로서
매우 낮은 방식으로 일하셨다.
누가
그분 안에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는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겠는가?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시를 싫어하시는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드러내어 일하시기보다
은밀하게 일하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후에
우주 안에
자신을 숨기셨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는
어디에서 그분을 찾을지
알지 못한다.
주님의 부활 이후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위한
주된 훈련은
그분을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노선과
함께 가는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기 원한다.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 계시지만,
그분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지 않는다.
주님은
안에 거하시지만,
그분의 내주하심을
의식하도록
하시지 않는다.
베드로는
그의 첫 서신서를 쓸 때쯤,
…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뵌 적이 없으면서도
사랑합니다.”
(벧전 1:8)
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결코 본 적도 없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한 분을
믿고 사랑한다.
우리가
자신의 무능함을
가장 잘 의식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게 임재하신다.
… 어떤 큰 이상이나 체험을
기대하지 말라.
또한 어떤 드러난 것을
기대하지 말라.
왜냐하면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하시며,
그리고 강력하게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책임은
그분의 내적인 음성,
곧 그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에
반응함으로써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다.
그 음성은 너무나
우리 자신의
느낌의 일부인 것처럼 보여서,
우리는 좀처럼
그것을
음성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여러분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음성에
여러분은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은밀하지만
끊임없이,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4일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왕상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여러분은
성경에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주목한 적이 있는가?
나는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이 질문을 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 중
어느 누구도
그분의 말씀에
그러한 표현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이심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
의로우신 분,
은혜와 자비로 가득하신 분으로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사야가
이 사상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주의하라.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 45:15).
이 말은
이사야의 말 중에
매우 강조된 말이다.
그는
상상의 결과로
공허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많은 축적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여러 사실들을
살펴보고 연구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손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지켜보았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체험들을 주목해 보았다.
이 모든 것을
관찰해 본 결과,
그 신언자는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사야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가?
여러분이
그의 책을
자세히 읽는다면
그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개인 생활 속에서
수많은 일들을 하시면서도,
그분 자신을
감추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끊임없이 일을 하고 계셨지만
항상 숨으셨다.
매우 많은 것들이
그분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행하는 이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사야가
어느 날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외쳤다.
우리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감추어지기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기를
열망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성한 특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큰 시험과 시련을
겪게 된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약 5:17)이었으므로
이 시험을
견디지 못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분명히 함께 계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타난 임재를
보여 주지 않으실 때
엘리야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낙담하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신언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왕상 19:9-10)
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어려움을
알고 계셨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기를 원했고,
하나님도
엘리야의 원함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가
이것을 깨닫도록
어떤 것을 보여 주셨다.
‘크고 강한 바람’이 일어났다
(11절).
엘리야는
주님께서
그 안에 계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
(11절).
바람에 이어
지진이 뒤따랐다.
엘리야는
주님께서 틀림없이
그 안에 계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
(11절).
이어서 불이 오자,
엘리야는
주님은 태워 버리시는 불이시니
그 안에 계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
(12절).
불이 지나간 후에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이 있었는데,
주님은 그 안에 계셨다
(12절).
엘리야는
그분께
‘오직 나만 남았거늘’
(14절)
이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매우 부드럽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다.
나는
자신을 숨긴다.
너는
내가 칠천 명을 남겼다는
사실을 모른다.”
(18절)
라고 말씀하셨다.
엘리야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에 따라서만
상황을 판단했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바람 가운데에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고,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 안에 계셨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을
그분 자신을 위해
보존하셨지만,
하나님의 활동은
감추어져 있어서
심지어 신언자 엘리야까지도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3일
마 6:5-6
또 여러분은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이미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기도할 때,
그대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보상의 문제를
말씀하고 계시지만
(마 6:1, 5),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보상이 아니라
생명의 성장이다.
성장을 드러내는 성도들은
건강한 방식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은밀한 생명의 성장이 필요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은밀한 체험이 필요하다.
우리는
은밀한 방식으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과 교통해야 한다.
그러면 아마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거나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님에 대한
이러한 은밀한 체험이 필요한데,
이는
그러한 체험들이
우리의 자아와 육체를
죽이기 때문이다.
화나 정욕은
추한 것이지만,
우리를
생명의 성장에서
가장 좌절시키는 것은
자아이다.
… 자아는
영광받기를 좋아하고
육체는
이목을 끌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많이 기도해야 하지만,
다른 이들이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
… 우리가
매일 기도하지만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과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 우리가
매일 얼마나 기도하는지를
항상 다른 이들에게 말한다면,
… 우리는
보상을 잃을 뿐 아니라
또한 생명이 자라지 못하고
건강하지 않을 것이다.
… 만일 우리의 의로운 행실들이
은밀한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생명이 성장하고 있고
건강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우리의 의로운 행실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드러내는 것은
생명의 성장을
크게 방해한다.
우주는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분이시고
은밀한 분이심을
나타낸다.
그분은
많은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분께서
그것들을 행하셨음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을지 모르지만,
우리 중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이는
그분께서
언제나 감추어져 계시고
언제나 은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처럼 은밀하고 감추어진
본성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생명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이 생명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전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이 사랑은 언제나
감추어진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간 생명은
나타내 보이고 전시하기를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언제나 감추어져 있다.
위선자는
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진 사람이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단지 밖의 나타남일 뿐
내적 실재가
조금도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감추어진 생명과
반대된다.
하나님은
그분 안에
매우 많은 것들을
가지고 계시지만,
단지 조금만
나타내신다.
만일 우리가
이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산다면,
많은 기도를 할지라도
다른 이들은
우리가
얼마나 기도했는지를
모를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만 원을 기부했다면,
다른 이들에게는
우리가
백 원만 기부한 걸로
알게 하는 것이
더 좋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한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서는
결코 이런 종류의 실행을
할 수 없다.
나타내 보이기를
즐기지 않는 생활은
오직 신성한 생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이 부분의 말씀의
중점이다.
우리가
왕국 백성이 되는 것에
진지하다면,
반드시 우리 아버지의
감추어진 생명에 의해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전시해 보이려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아버지의
감추어진 생명에 의해 산다면,
우리는
공공연히 나타내 보이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행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은밀한 가운데 있을 것이며,
다른 이들의 눈에서부터
감추어질 것이다.
구제하는 것과 같이
기도할 때에도
왕국 백성은
공공연히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마 6:5).
… 사람의 칭찬을 구하기 위한 기도는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얻을지 몰라도
아버지로부터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헛된 기도이다.
우리의 기도는
은밀한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
(마 6:6).
… 왕국 백성은 반드시
자신의 골방에서 기도하는
어떤 체험을 가짐으로써,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하늘의 아버지를 접촉하고,
아버지에 대한
어떤 은밀한 누림을 체험하며,
아버지에게서
어떤 은밀한 응답을 받아야 한다.
2일
마 6:3-4
그러나 그대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대의 구제를
은밀한 가운데 하십시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들 앞에서
여러분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 앞에서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의는
2절부터 4절까지에 언급된
구제하는 것과
5절부터 15절까지에 언급된
기도하는 것과
16절부터 18절까지에 언급된
금식하는 것과 같은
의로운 행실들을
의미한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절들은
왕국 백성의
의로운 행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들은
자아와 육체를 드러낸다.
우리는
화나 정욕보다
더 나쁜 무언가를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
… 이 열여덟 절에서
주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자아와 육체로 가득한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세 가지 예인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사용하신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의 육체는 언제나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그들 앞에서
선한 행실을 하기
원한다.
그러나 왕국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서
비워지고 겸손해진 영으로 살며,
순수하고 단일한 마음으로 행하는
왕국 백성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육체 안에서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하늘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영 안에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마태복음 6장의
세 가지 각각의 예시에 관해서
주님은
‘은밀한’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4, 6, 18절).
우리는
의로운 행실을
은밀한 가운데 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은밀한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4절에서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께서
은밀한 가운데 보신다고
말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인
왕국 백성은
아버지의 임재 안에 살며
아버지의 임재를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아버지의 왕국을 위하여
은밀하게 행하는 것마다
아버지께서
은밀한 가운데 보신다.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께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것은
은밀한 가운데
의로운 행실을 하도록
왕국 백성에게
격려가 되어야 한다.
이 절에서 또한
주님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 시대에 일어날 수도 있고
(고후 9:10-11),
장래 오는 시대에
보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다
(눅 14:14).
은밀하게
우리의 의로운 행실을
행한 결과는
육체와 자아가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실을 과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면,
그러한 선한 행실을 행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은
오늘날
하락한 기독교의
통탄스러운 실행이며,
특히 모금하는 데 있어서
그러하다.
… 더 많이 과시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낼 것이다.
분명히 그러한 과시는
육체에 속한 것이다.
… 의로운 행실에 관한
우리 왕국 백성의 기본 원칙은
결코 우리 자신을
나타내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능한 한
자신을 숨기고
자신을 가리며
은밀한 가운데 행하라.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극히 감추어져야 한다
(마 6:3).
이것은
우리가 하는 것을
다른 이들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삼 일 동안 금식을 한다면,
상한 얼굴을 보이거나
슬픈 기색을 띠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금식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은밀한 가운데
금식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금식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앞에서
은밀한 가운데 금식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자아와 육체를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교회 집회에서
기능을 발휘할 것을
격려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 자신을 보이기 위해
기능을 발휘하려는
위험이 있다.
사람 앞에서 행하려는
위험이 있다.
…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감추어진 방식으로
행해야 한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을
행하려 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의롭게 행하라.
다른 이들이
그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게 하라.
오직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의로운 행실을 행하라.
우리 아버지는
은밀한 가운데 보신다.
우리가
우리의 방에서
홀로 기도할 때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보신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큰 거리 모퉁이나
회당에서
기도하지 말라.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아버지께 보이기 위해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라.
그럴 때 우리는
은밀한 가운데
그분으로부터
응답을 받을 것이다. …
가능하다면
모든 것을
은밀한 가운데 행하고,
여러분의 자아에
어떤 기회도 주지 말고
여러분의 육체에
어떤 근거도 주지 말라.
신언노트, 2019 05 19
한 숨겨진 생활을 삶에 의하여
그 왕국 생활을 삶
(한 숨은[비밀의] 생명을 생활함으로써
그 왕국 생명을 생활함)
우리는
기도하시기 위하여
은밀하게
(privately;
남몰래, 비공식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분의 그 산으로 올라가심 안에서
한 숨겨진 생활을 사시는
주님의 그 본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무리들과 함께한
(with the crowds;
그 사람들과[군중과] 함께)
그 기적의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오천 명의 남자들을 먹이심의 그 기적[의])
그 결과 안에
머무르지 않으셨고
(did not remain;
남아 있지 않으셨고),
오직(but) 그분께서
은밀하게
그들로부터 떠나가셨으며
(went away from them)
기도 안에서
그 산 위에서(on)
그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께서
그 아버지께
은밀하게 기도하시는
더 많은 시간을
가지실 수 있도록
(in order that He might have)
그 제자들이
그분을 떠나게
강제하셨습니다
(compelled;
강요하셨습니다, 내모셨습니다,
억지로 시키셨습니다).
그분께서
그 하늘들 안에 계셨던(was;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
은밀하게 기도하실
필요가 있으셨는데,
이는(so that; 그 결과)
그 하늘들의 그 왕국을
세우심을 위하여
(for the establishing;
…의 그 확립시키심을[안정시키심을] 위하여)
그분께서
땅 위에서 하셨던
어떤 것 안에서든
(in whatever; 무엇에서나)
그분께서
그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고
(might be one;
하나이시고)
또 그분과 함께하시는(with; 함께)
그 아버지를
가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께서
이것을
그 버림받은 곳에서
(in the deserted place;
그 황폐한 곳에서, 사람이 없는 그 장소 안에서)
하셨던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산 위에서 (하셨고),
그 모든 사람들,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떠나셨으며
(leaving; 두고 가셨으며),
이는(so that; 그 결과)
그분께서
그 아버지를 접촉하시기 위하여
혼자 계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세 구들을
(three phrases; 세 구절들을)
귀중하게 여겨야만 합니다
―‘그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to be with)’,
‘그 산 위에서(on)’,
또 ‘기도 안에서(in)’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with others)
기도하는 것이
좋지만,
자주 우리가
혼자서
(by ourselves;
다만 혼자서, 다른 사람 없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은밀하게 주님께 기도할 때만큼
깊이
주님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주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은밀하게
우리의 문을 닫아야만 하고
또 비밀리에 보시는
(sees in secret;
비밀히[숨어서] 아시는)
그 아버지께
기도해야만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친밀하신지
또 우리가
그분께
얼마나 가까운지에 관한(of; …의)
그 감각을
(the sensation; 그 느낌을)
가집니다.
우리는
그 무리들,
우리의 가족,
우리의 친구들,
또 그 교회 안에 있는 그 성도들을
떠나서(to leave)
한 “높은 산” 위에 있는
더 높은 한 수준까지
(to a higher level;
한 더 높은 높이[단계, 정도]까지)
가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더 낮은 한 수준 위에 있는
땅에 속한 그것들로부터
(from the earthly things;
그 세속적인[세상의, 지구의] 것들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서
더 높이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더 높은 한 수준까지 이르러
(to get; 도착하여, 와서),
그 무리로부터 분리될
(separated; 분별될),
곧 은밀하게 또 비밀하게
그 아버지와 함께 있어서(to be)
그분과
친밀한 교통을 가질(to have)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왕국 백성의
그 원칙은
그들이
한 숨겨진 생활을
사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의로운 행위들을
―기부함(giving; 줌),
기도함,
또 금식함과 같은 행위들을
실행하지 않습니다
(not performing;
수행하지[공연하지, 연기하지] 않습니다):
이 세 실례들의 각각에 관하여,
주님께서
‘비밀(secre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마 6:4, 6, 18);
우리의 아버지께서
‘비밀리에(in secret)’ 계시고
‘비밀리에 보십니다’;
그 왕국 백성은,
하늘의 그 아버지의 아이들로서,
반드시 그 아버지의
비밀과
또 숨겨진 임재 안에
살아야만 하고
또 (그것을)
무척 좋아해야만 합니다
(must … care for;
돌보아야만 합니다).
그 왕국의
하늘에 속한 그 다스림 아래에서
비워진 또 겸허해진
한 영 안에서 살고
또 순수한 또 단일한
한 마음 안에서 행하는(walk; 걷는)
그 왕국 백성은,
사람들의 그 칭찬을 위하여
그 육체 안에서
어떤 것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오직 그들의 하늘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림을 위하여
(for the pleasing of … Father)
그 영 안에서(in the spirit)
모든 것들을 해야만 합니다.
비밀리에
우리의 의로운 행위들을 함의
그 효과는
(The effect; 그 영향은[결과는])
그 육체와 또 그 자아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회 안에 있는
또 심지어 하락한 기독교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선한(good; 좋은) 행위들을
과시하는 것이
(to make a show of;
자랑함이, …의 한 보여 줌을 만듦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아는
영광받는 것을 사랑하고
(loves; 대단히 좋아하고),
또 그 육체는
응시되는 것을
(to be gazed upon;
바라보아짐을)
사랑합니다.
공공연하게
(openly;
드러내 놓고, 터놓고, 숨김없이, 솔직하게)
자라는
그 성도들은
한 건강한 방식으로(in; 안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 안에서의
어떤 비밀한 성장
(some secret growth;
어떤 남모르는[숨은, 은밀한] 성장),
곧 그리스도에 관한(of; 의)
어떤 비밀한 체험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한 비밀한 방식으로(in; 안에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경배하며,
주님을 접촉하고,
또 주님과 교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기도해야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가 기도하는지를
알게 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함이나
또는 그들이
그것에 대하여
알게 함 없이
매일 기도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과
(that … are healthy;
건전하다는[정상적이라는] 것과)
또 우리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왕국 백성은 반드시
그들의 혼자 있을 수 있는 방 안에서의
(in their private room;
그들의 사적인[비공개의, 은밀한, 비밀한]
방 안에서의, 그들의 골방에서의)
기도의 어떤 체험을
가져야만 하고,
비밀리에(in secret)
그들의 하늘의 아버지를
접촉해야만 하며,
그 아버지에 관한(of; …의)
어떤 비밀한 누림을
체험해야만 하고,
그분께로부터
어떤 비밀한 응답을
(answer;
대답을, 해답을, 반응을, 해결책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언제든지(Any time)
우리가
우리의 의로운 행위들 안에서
우리 자신들을 드러내면
(exhibit;
전시하면, 나타낸다면),
우리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한 드러냄은
우리의 생명 안에서의 성장을
크게 좌절시킵니다
(frustrates; 방해합니다).
우리의 사람의 생명은
한 전시
(a display;
한 과시, 한 전람, 한 진열),
곧 한 공개적인 보여 줌을
(a public show;
한 공개된[널리 알려진, 공공연한, 소문난]
뽐냄을[허식을, 허세를, 표현을, 외관을, 티를])
만드는 것을
사랑하지만
(loves; 대단히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항상 숨겨져 있습니다;
한 위선자는
속에
(within; 안에는)
아무것도 가짐 없이
한 겉보기의 나타냄을
(an outward manifestation;
한 외적인[표면상의, 밖으로 향하는, 육체적인]
드러내 보임을[표명을, 명시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서
비밀리에
한 숨겨진 생활을 삶을
(living a hidden life;
한 숨은 생명을 사는 것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 신성한 생명,
곧 한 과시함을
(making a show;
한 자랑함을[보여 줌을 만듦을])
즐기지 않는
그 생명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왕국 백성이 됨에 대하여
(about being …;
… 백성임에 관하여)
진지하다면
(if … are serious;
심각하다면, 진심이라면, 엄숙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아버지의
그 숨겨진 생명에 의하여
(by the hidden life;
그 숨은 생활로)
사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 우주는
하나님께서
숨겨져 계시다는 것,
곧 하나님께서
비밀하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이 사랑은 항상
숨겨져서 남아 있을 것입니다
(will always remain hidden;
언제나 숨겨진 채로
계속 머무를 것입니다).
“참으로
(Surely;
확실히, 틀림없이, 정말)
당신께서는
자신을(Himself) 숨기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 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구원자시여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 45:15):
믿는 이들은
하나님을
그 전능하신 한 분,
그 의로우신 한 분,
은혜와 또 자비가(of) 충만하신
그 한 분으로
알 수 있지만,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hides)
그 한 분으로서,
그분께서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으십니다
(is unknown;
경험되지 않으십니다,
헤아려질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한가운데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또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들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하시지만,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을 감추십니다(conceals):
하나님께서는
감춤을
(concealment;
숨김을, 은폐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전시를
(display;
과시를, 전람을, 진열을)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보기의 나타냄들을
(outward manifestations;
외적인 드러내 보임들을)
갈망하지 않으시지만
(does not crave;
열망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그것들 없이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갈멜산 위에서
엘리야와 함께 계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명백한(manifest; 분명한) 임재를
주지 않으셨을 때
(when … withheld;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 억제하셨을 때),
엘리야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could not bear it;
그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분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는
한 하나님이시기를
(to be a God;
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원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had not realized;
체득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또 강한 그 바람 안에
계시지 않았고,
그분께서
그 지진 안에
계시지 않았으며,
또 그분께서
그 불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한 “부드러운
(gentle;
온화한, 순한, 너그러운,
예의 바른, 평온한, 조용한),
곧 조용한
(quiet;
말이 별로 없는, 차분한, 안정된,
평온한, 온화한, 부드러운)
목소리(voice; 음성)” 안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곧 조용한
한 목소리 안에서
(in a … voice; 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는
그 사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신약 시대 안으로
안내하고 계셨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안에서
(in which; 그 신약 시대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천둥 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not by thundering;
우레와 같은 큰소리로 말씀하시지 않고,
소리 지름[고함침]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직 부드럽게 또 조용하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그가
남아 있었던
유일하게 신실한
그 한 사람이었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바알에게
그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들을
그분 자신을 위하여
(for Himself; 스스로)
따로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심에 의하여
엘리야에게
매우 부드럽게
대답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그가 볼 수 있었던 무엇으로
(with what; 무엇과 함께)
그 상황을 추정했지만
(had reckoned;
생각했지만, 계산했지만, 판단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바알에게
그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이기는 이들을
그분 자신을 위하여
비밀하게
따로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그렇게 숨겨져 있었고
그래서(that)
그 신언자 엘리야조차도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그 숨겨진 본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강력한(mighty) 영향력들,
위대한(great) 이상들,
또 거대한(tremendous) 계시들만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surest) 일은
우리의 존재들의
그 비밀 안에서
(in the secret;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 안에서,
은밀한 곳에서)
행하여집니다
(is done;
일해집니다, 수행됩니다).
더 많이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또 더 많이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수록,
하나님께서
매우 조용하신 한 하나님이시고,
너무 조용하셔서(that)
그분의 임재가
흔히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is often undetected;
자주[종종] 감지[탐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더 많이 깨닫습니다.
그분의
우리를 안내하심의
가장 친밀한 방식이
너무 자연스러워서(that)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안내하고 계신다는 것을
거의 조금도 감지하지 못하지만
(scarcely perceive … at all;
거의 조금도 인지[지각, 파악]하지 못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somehow;
어떻게든지 해서, 그럭저럭, 아무튼)
인도되어 왔습니다
(have been led;
이끌렸습니다, 안내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큰 안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흔히
(often; 자주)
하나님의
이 조용한 내적 활동에 의해서입니다.
그 유일하게 나신 아들께서
(the only begotten Son; 그 독생자께서)
하나님을 표명하심의
(declaring God;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심의[분명히 말하심의,
공표하심의, 나타내심의, …임을 밝히심의])
그 목적을 위하여
오셨을 때,
그분께서
사람의 한 생명 안에
그분을 숨기셨습니다
―그의 모양이
(whose appearance)
“손상되었던
(marred;
훼손되었던, 망쳐졌던,
보기 흉하게 되었던),”
사람의 한 생명,
곧 매혹하는 형태도
(form;
형체도, 모습도)
또는 위엄도
(majesty;
존엄도, 장엄함도, 위풍당당함도)
가지지 않았던
사람의 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갈릴리,
곧 중요하지 않은
(insignificant;
대수롭지 않은, 하찮은, 의미 없는)
한 지방으로부터 오셨고
(came from …; 한 지방 출신이셨고),
또 나사렛이라는 그 도시
(the town; 그 읍),
곧 한 작은 도시로부터 (오셨는데)
그것에 관하여
(of which; 그 작은 도시에 관하여)
어떤 신언자나
또는 명성 있는(of repute; 저명한) 사람도
거기에서부터 오지 않았다고
(거기 출신이 아니라고)
그 유대인들에 의하여
말해졌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나타나셨을 때
(when … appeared;
보이기 시작하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found it hard to believe;
… 생각했습니다[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한 신언자이셨다는 것을
믿는 것조차도 어렵다고
여겼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사렛의(of; … 출신의) 예수님 안에
숨겨지셨습니다.
또한,
나사렛의 예수님께서
한 가난한 집에 속하셨고
또 자라셨으며
한 목수
―매우 평범한 한 목수가
되셨고,
그분께서
삼십 세가 되시기까지,
매우 작은 한 방식으로
(in a very small way;
아주 소규모로[조촐하게, 하찮게,
초라하게, 신분이 낮게, 영향력이 없게])
일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그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사셨다는 것을
(that He was indwelt by …;
그분께서
하나님에 의하여
내주되셨다는 것을)
누가 한 번이라도
생각했을 것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주의 깊게
그 성경을 연구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시를 싫어하시는
(dislikes ostentation;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이 같은
(the kind of; 이 종류의)
성품을
(temperament; 기질을, 체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볼 것입니다
(will see; 알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공공연하게보다(than openly)
비밀하게 일하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분을
(Whom; 예수 그리스도를)
뵙지 못했지만,
여러분이 사랑합니다;
그분 안으로(into whom)
현재는 그분을 뵙지 못하지만,
믿고 있고,
여러분이
말할 수 없는
또 영광으로 가득한
큰 기쁨으로
(with joy; 환희로)
크게 기뻐합니다
(exult;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의기양양합니다, 뛰어오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뵌 적이 없으면서도
사랑합니다.
지금도
그분을 뵙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으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며)”:
그 믿는 이들이
뵙지 못한 그 한 분을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한 놀랄 만한 일이고
(a wonder;
한 경이로운 일[기적]이고)
또 한 신비입니다
(a mystery;
한 비밀[수수께끼]입니다)(벧전 1:8).
주님의 그 부활 이후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그 주된(chief; 주요한) 훈련은
그분을
자신을 숨기시는 한 하나님으로 앎의
그 노선을 따라 왔습니다
(has come along the line;
그 노선과 함께[…에 부합하여, …을 가지고]
왔습니다[생겼습니다]).
그것의
(its;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임과
(centrality; 구심성과, 중심적 역할과)
또 광범위함이신
(as … universality; 보편성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경륜의
각각의 모든 것들은
그 보여지는 영역 안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의
그 보여지지 않는
분위기와
(atmosphere;
기운과, 장소와, 공기와, 대기와)
또 영역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능을 가장 자각할 때
(When … are most concious of impotence;
무력을 최고로[극도로]
의식할[알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게 임재하십니다
(is most powerfully present;
최고로 강하게[유력하게] 계십니다):
자신을 숨기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들 안에서
일하시고
(is at work;
작업하시고, 움직이시고, 효과를 내시고),
또 그분께서
힘차게
(mightily;
기운차게, 격렬하게, 맹렬히, 강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안에서
(within;
내부에서, 마음속에서)
그분의 목소리
―그 “부드러운, 곧 조용한 목소리”에
반응함에 의하여
그분과 협력하는 것인데,
그 음성은 너무 많이
우리 자신의 느낌들의
한 부분인 것처럼 보여서(that)
우리는
거의 조금도
(scarcely … at all)
그것을
한 목소리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의
그 가장 깊은 깊이들 안에
(in the deepest depths;
그 가장 깊은 곳들 안에)
새겨진
(registered;
기록된, 등록된, 적힌,
명기된, 명심하게 새겨진),
그 목소리에,
우리는 반드시
아멘(Amen)이라고
말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서,
비밀하게
또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시는
그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2편 7절은
“깊은 곳이
깊은 곳을 향하여
부릅니다
(Deep calls unto deep;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르며)”
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직 우리 속의 깊은 곳에서부터
유출되는 것에만
깊은 속에서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곳들에서부터 있지 않는
어떤 것도
다른 사람들의 그 깊은 곳들에
결코 도달하지 않습니다.
그 왕국 생활은
그 깊은 곳들 안에 있는
한 생활,
곧 “아래로
뿌리를 내릴 수 있고
(can take root)
위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 생활입니다
(사 37:31).
한편으로,
우리는
생명의 그 씨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좋은 땅인
우리의 마음의
그 토양(soil; 흙)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시도록
허락해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식물들로서(plants),
그 좋은 땅의 그 실재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의
그 토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좋은 땅은
그 좋은 마음을
나타내는데
이는(that)
세상적인 통행에 의하여
딱딱해지지 않고,
숨겨진 죄들이 없으며,
또 그 시대의 그 염려와
또 재물의 그 속임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이것들을 처리하시도록
매일 허락해 드릴
필요가 있고
그 결과(so that)
우리가
하나님의 그 성장과 함께
(with the growth of God;
하나님의 그 자라심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좋은 땅의
그 실재이신
그리스도 안에
심겼기(have been planted; 심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내어
(to take time)
그분을 흡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 아침에
[in the morning; 내일 아침에]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의 시간 안에서[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가에,
어떤 씨는 흙이 얕게 덮인 바위들 위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말씀을 받는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주 예수님은
이 서로 다른 상태들 중의 하나인
바위들 위에
흙이 얕게 덮여 있는 상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표면에
흙이 얕게 덮여 있고
그 아래에는
바위들이 있는 것입니다.
씨가
이런 종류의 땅에 떨어질 때
그 씨는
곧 싹을 내지만,
해가 돋아 내리쬐자마자
이 싹은
뿌리가 없어
말라 버립니다.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토양 아래에서 일어나는
성장입니다.
잎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토양 위에서 일어나는
성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뿌리는 감추어진 생활이며,
반면에 잎은 드러난 생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문제점은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많이 있지만,
비밀한 생활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추어진 생활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체험이 드러난다면,
이때 우리의 모든 성장은
위를 향한 것이고,
아래를 향한 성장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뿌리 없이
잎만 있는 사람인 것이고,
얕은 흙 위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미덕을 과시하고,
자신의 존재의 깊은 곳에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시험과 유혹의 때에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심으로
우리가
아래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갔고
낙원으로 이끌려 갔지만,
십사 년이 지날 때까지
그 체험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뿌리는
토양 아래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일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뿌리’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외적인 행실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내적인 생명을
가져야 하고,
바울의 드러난 능력을
가지기 원한다면
바울의 은밀한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간증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체험들이
감추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뿌리가 없는 것은
어떤 감추어진 보물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감추어진 생활이나
감추어진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체험들은
덮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가지고 있는
비밀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셔서
무언가를 드러내실 때에만,
우리는
용기를 내어
그것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체험을
어느 형제에게
교통해 주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감히
그것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법칙,
곧 교통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체들 사이의
생명의 흐름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감추어진 부분,
곧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
깊이가 없다면,
우리의 피상적인 일은
다른 이들의 삶에
피상적인 영향만을 줄 것입니다.
오직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릅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적인 생활은
하나님과의
내적이고
감추어진
그리고 중단되지 않는
교통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입니다’
(호 14:5).
이런 종류의 생활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주님과
직접적이고 친밀한
교통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아가 4장 12절은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추구하는 이는
자신의 영적 진보의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열린 동산이 아니라
잠근 동산입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분의
기쁨을 위한 것이고,
다른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믿는 이들이
조금 더 잠그고
더 단단하게 봉한다면,
그들의 일은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뿌리를 박고
깊은 곳에서
감추어진 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서
더 깊은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1일
마 6:6
그러나 그대는
기도할 때,
그대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마 14:22-23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 그분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 무리를 돌려보내신 후에,
그분은
기도하시러
홀로 산에 올라가셨고,
밤이 되어도
거기 혼자 계셨다.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행하신 후에,
그분은 기도하시러
홀로 산에 올라가셨다
(마 14:23, 눅 6:12).
그분은
무리와 함께
기적의 결과 안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기도 가운데
아버지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시어
홀로 산에 올라가셨다.
만일 우리가
어떤 곳에 가서
큰 성공을 이루었을 때,
우리는 바로
그곳을 떠나겠는가
아니면 이 큰 성공을 누리기 위해
그 안에 머무르겠는가?
우리는
주 예수님의 본을
보고 따라야 한다.
그분은
그분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기적의 결과 안에
머무르지 않으셨다.
그 대신에 그분은
기도하시러
홀로 산에 올라가셨다.
‘홀로’라는 말은
매우 의미가 깊다.
이것은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기도하러 가시는 것을
알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다.
만일 알리셨다면,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을 것이다.
그분은
기도 가운데
아버지와 함께하시기 위해
홀로 떠나셨다.
나는
이 세 구절,
곧 ‘아버지와 함께’,
‘산 위에서’,
‘기도 가운데’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산에서
기도하기를
훈련함으로써
여기에 있는
주님의 본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분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마 14:19)
그분께서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셨음을
뜻한다.
그분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그분께서
기도 가운데
아버지와 함께 있기를
원하셨음을
뜻한다.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마 3:17)
사람의 위치에 서 계시는
(마 4:4)
하늘의 왕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홀로 기도하실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천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아버지와 하나 되시고,
땅에서 무엇을 하시든지
아버지와 함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은
외딴곳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혼자 아버지를 접촉하시기 위해
모든 사람,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에게서도
떠나시어
산에서 기도하셨다
(마 14:23).
왕국 백성은
자신의 골방에서 기도하는
체험을 가져야 하는데,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그들은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하늘의 아버지를 접촉하고,
아버지를
은밀한 가운데 누리는
체험을 하며,
그분에게서
은밀한 응답을 받는다
(마 6:6).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자주 혼자서
기도해야 한다.
다른 이들과
함께 기도할 때,
우리는
홀로 주님께 기도할 때만큼 깊이
주님을 누릴 수 없다.
심지어 주 예수님도
우리에게
우리가 기도할 때
홀로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마 6:6).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친밀하시며,
우리가
그분께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무리와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친구들과
교회 안의 성도들을
떠나서
더 높은 수준에 있는
‘높은 산’에 올라가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더 낮은 수준에 있는
땅에 속한 것들을
멀리 떠나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무리와 분별되어
더 높은 수준에 올라가서,
홀로 은밀하게
아버지와 함께하며
그분과
친밀한 교통을 나누어야 한다.
이것이
산에서
기도 가운데 머무르는 것의
의미이다.
그분께서
기도하시러
홀로 산에 올라가신 것은,
기적의 결과를
누리는 일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썩어 없어지는
양식으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구하도록,
또한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
보내심받고
확증받은 분이시며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도록,
그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요청하셨음을
암시한다
(요 6장).
그분께서
기도하시러
홀로 산에 올라가신 것은 또한
기적에 의해
음식을 먹은
오천 명의 사람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에 관해
아버지께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고자 하셨음을
보여 준다.